좋은 시 모음

가슴에 내려앉는 시모음

뉴우맨 2022. 4. 26. 22:25

목숨의 노래/ 문정희


당신 처음 만났을 때
사랑한다
이 말은 너무 작았습니다
같이 살자
이 말은 너무 흔했습니다
그래서
목숨을 내걸었습니다
처음과 끝
가고 싶었습니다
맨발로
 

 

구두가 남겨졌다/ 나희덕


그는 가고
그가 남기고 간 또 하나의 육체
삶은 어차피 낡은 가죽 냄새 같은 게 나지 않던가
씹을 수도 없이 질긴 것
그러다가도 홀연 구두 한 컬레로 남는 것

 

그가 구두를 끌고 다닌 게 아니라
구두가 여기까지 그를 이끌고 온 게 아니었을까
구두가 멈춘 그 자리에서
그의 생도 문득 멈추었으니

 

얼마나 많이 걸었던지
납작해진 뒷굽 어느 한쪽은 유독 닳아
그의 몸 마지막엔 심하게 기우뚱거렸을 것이다
바닥에 가 닿는 소리
생이 끝나는 순간에야 듣고 소스라쳤을지도 모른다
짧다

 

구두 한 컬레 그 속에
그의 발이 연주하던 냄새 같은 게
그를 품고 있던 어둠 같은 게
온기처럼 한 웅큼 남겨져 있다 날아간다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김소월


봄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밟아도 쳐다볼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너를 위하여/ 김남조


나의 밤기도는
길고
한 가지 말만 되풀이한다

 

가만히 눈뜨는 건
믿을 수 없을
축원
피어난 빛으로만
속속들이 채워 넘친 환한 영혼의 내 사람아

 

쓸쓸히
검은 머리 풀고 누워도
이적지 못 가져 본 사랑

 

너를 위하여 나 살거니
소중한 건 무엇이나 너에게 주마
이미 준 것은 잊어버리고 못다 준 사랑만을 기억하리라
나의 사람아

 

눈이 내리는 먼 하늘
달무리 보듯 너를 본다

 

오직
모든 것에 이름이 있단다
나의 사람아
 

사모곡/ 감태준


어머니는 죽어서 달이 되었다
바람에게도 가지 않고
길 밖에도 가지 않고,
어머니는 달이 되어
나와 함께 긴 밤을 같이 걸었다
 

 

한밤으로/황동규

 

우리 헤어질 땐
서로 가는 곳을 말하지 말자
너에게는 나를 떠나버릴 힘만을
나에게는 그걸 노래부를 힘만을.

 

눈이 왔다, 열한시
펑펑 눈이 왔다, 열한시

 

창밖에는 상록수들 눈에 덮이고
무엇보다도 희고 아름다운 밤
거기에 내 검은 머리를 들이밀리.

 

눈이 왔다, 열두시
눈이 왔다, 모든 소리들 입 다물었다, 열두시

 

너의 일생에서 이처럼 고요한 헤어짐이 있었나 보라
자물쇠 소리를 내지 말아라
열어두자 이 고요 속에 우리의 헤어짐을.

 

한시
어디 돌이킬 수 없는 길 가는 청춘을 낭비할만큼 부유한 자 있으리오
어디 이 청춘의 한 모퉁이를 종종걸음 칠만큼 가난한 자 있으리오
조용하다 지금 모든 것은.

 

두시 두시

 

말해보라 무엇인가 무엇인가 되고 싶은 너를.
밤새 오는 눈, 그것을 맞는 길
그리고 등을 잡고 섰는 나
말해보라 무엇인가 새로 되고 싶은 너를.

 

이 헤어짐이 우리를 저 다른 바깥
저 단단한 떠남으로 만들지 않겠는가.
단단함, 마음 끊어 끌어낸.....
너에게는 떠나버릴 힘만을
나에게는 노래부를 힘만을

 

겨울 나무/김혜순


나뭇잎들 떨어진 가지마다
바람 이파리들 매달렸다

 

사랑해 사랑해
나무를 나무가 가두는
등굽은 길 밖에 없는
나무들
떨어진 이파리들 아직도
매달려 있는 줄 알고
몸을 흔들어 보았다

 

나는 정말로 슬펐다. 내 몸이 다 흩어져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이 흩어져
버리는 몸을 감당 못해 몸을 묶고 싶었다. 그래서 내 몸의 갈비뼈들이 날
마다 둥글게 둥글게 제자리를 맴돌았다. 어쨌든 나는 너를 사랑해. 너는 내
몸전체에 박혔어. 그리고 이건 너와 상관없는 일일 꺼야. 아마,

 

나는 편지를 썼다
바람도 안부는데
굽은 길들이 툭툭
몸 안에서
봄 밖으로
부서져 나간다


가정법 고백/박상천

 

사랑 고백을
해 본 사람은 안다.
그 한마디를 입에서 꺼내기가 얼마나 어려운 지를.

 

사랑 고백을 해 본 사람은 안다.
김승옥이 무진기행에서

 

<'사랑한다'라는 그 국어의 어색함>
이라고 했던 의미를.

 

고등학교 시절

 

나는 그녀에게 고백하고 싶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가슴에 눌러둔 그 한마디를 하지 못하면
말 그대로 죽어버릴 것 같았다.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 주며
그 한마디를 하고 싶었지만
입 안의 침만 마를 뿐,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얼굴이 희미하게 보이는
어두운 골목길에 이르러
그녀에게 고백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면 어쩌겠니.'

 

오, 어리석었던
가정법 고백.

 

詩,

한밤으로를 오랜만에 읽으며 졸업생 분들이 떠오르더라구요. 구두가 남겨졌다에서는 아버지가, 사모곡에서는 당연스레 어머니가 떠오르구요. 시를 읽으면서 다들 각자 개인의 사연, 감정들을 이입하며 읽으니까 시는 누가, 또 언제 읽느냐에 따라 매순간 순간 변하는 거 같아요. bgm은 이연희가 부른 '인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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