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톡의 좋은 시

노인, 노년 등에 관한 시모음

뉴우맨 2023. 2. 26. 05:01

노인, 노년 등에 관한 시모음 9)



노인            /노정혜



나이 많으면

지금까지 배워 쌓은 지식 높은 줄 알았네

지식은 낮아지고 고집만 높아졌네

나이가 많으면 부자가 될 줄 알았네

통장 비었네

나이 많으면 효도받을 줄 알았는데

직장 없어 부모 주머니 바라보네

나이 많으면 친구 많을 줄 알았네

사는 곳 어디인지

소식 멀어지네

생각은 고향에 머물고 고향 친구 정 깊네

나이 많아 일하고 싶은데

노인이라 부르네

청년 일자리 모자란 데

노인 일자리가 어디 있나

집에 가서 애나 봐라

자식들은 제 둥지로 가고

어쩌다 만난 손자 노인 냄새난다고 싫다네

노인 됨 서러운데 어디서 환영받나



아픈 곳만 늘어만 가네





노인과 그림자        /고지영


1960년 서울역 앞

펑생을 함께 지겟 짐 날으며 살아온
백발의 그림자가 있소
그림자는 어둠을 먹고 빛에 살며
노인은 지게를 먹고 외로움에 살아요

아빠 한번 불러 보지 못한
칠삭둥이 딸애 업고 야반 도주 한 마누라
찾아도 소용없는 일
솟대처럼 넋 놓고 앉아 먼 산 바라만 보고 있을 뿐
딸애 우는소리 환청에 잠 못 든다

허구한 날 연탄까스
쉰 김치통에 빠져 허우적대는
추억들만 도배되여 얼룩져 있는 곳
눈보라 치는 지하방 한 칸

날갯죽지 꺾인 독수리 처럼
눈빛은 녹슬어 가고
그림자는 서서히 사라진다





독거노인이 사는 집      /이명윤



그날 복지사가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에 노인이 느닷없는 울음을 터뜨렸을 때 조용히 툇마루 구석에 엎드려 있던 고양이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단출한 밥상 위에 내려놓은 놋숟가락의 눈빛이 일순 그렁해지는 것을 보았다. 당황한 복지사가 아유 할머니 왜 그러세요, 하며 자세를 고쳐 앉고 뒤늦게 수습에 나섰지만 흐느낌은 오뉴월 빗소리처럼 그치지 않았고 휑하던 집이 어느 순간 갑자기 어깨를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뭔 일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벽에 걸린 오래된 사진과 벽시계와 웃옷 한 벌과 난간에 기대어있던 호미와 마당가 비스듬히 앉은 장독과 동백나무와 파란 양철 대문의 시선이 일제히 노인을 향해 모여들어 펑펑, 서럽게 우는 것이었다.





노년        /돌샘 이길옥



집안의 뼈대를 세우기 위해

가장의 위엄이 기를 쓰던 시대가 문을 닫고



목소리 하나로 식솔을 휘어잡던 횡포가

꼬리를 자른 뒤 고전에 스며 몸을 사린다.



기세등등하던 어른의 자리에서 주춧돌이 빠져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를 밟고 일어서는 환호 움켜쥐고

억압에 당했던 분노가 불끈 허리를 펴자

당당하고 서슬 퍼렇던 체면의 뼈마디가

삐거덕 뒤틀리면서 중심을 잃고 휘청거린다.



풀이 빠진 옷깃처럼

위력 잃은 몰골이 측은하다.



수시로 열 오르던 목청이 힘을 잃고

빳빳하게 세웠던 권위와 위신이 뒷전에 몰려

눈치로 길들어지며 기가 죽는다.



가시가 박혔던 호령이 삭아 내리고

날이 섰던 위세가 무뎌지며 눈빛에 성에가 낀다.



관심의 말뚝을 뽑고 등 돌려 쥐 죽은 듯이 누워

간섭의 끈을 자른 편안함에 석양이 찾아든다.



어둠에 늙음이 젖어 든다.





꼰대         /강보철



나 때는 말이야

요즘 것들은

푸념의 공간에서

입도 벙긋 못하는 가슴앓이



감자가 물에서

이리저리 서로 부딪히며

때를 벗듯이

시간을 끌어안은

겸손한 죄인이고 싶다



내가 왔다는 어떤 기록도

내가 갔다는 어떤 흔적도

남기지 말자

헌신과 가치는 어딘가 있다



고통은 이겨내고

삶의 품격을 되찾기 위해

당신이 찾는

부드러운 일꾼이고 싶다



지나고 나면 시간의 그림자

해가 뜨면 길게, 짧게

해가 지면 사라질 그림자가 될걸

나 때는 꽁꽁 싸매고

요즘 것은 가슴으로 받는다.





홀로 된 노인          /고재종



저처럼 금숭어 튀어오르며 그리는

금빛 아치의 순간을 보는

저 노인, 저리는 발 담그지 않았을지라도

강물은 이미 노을에 감전돼 있다.

하루 내내 잘 익은 포도주빛 노을, 그 속에

봉우리를 헹구는 병풍친 산들은

또 검푸러지며 능선들을 미끈히 뽑을 때

저 노인, 거친 노동의 단내 나는 숨결도

이제 강심으로 잦아드는가.

적막강산, 이렇게 흘러도 좋다지만

아직도 허기를 못 면한 소쩍새는

물살을 더욱 흔들어놓는 지금, 저 노인의

가난도 절뚝거리며 강변을 돌아온다.

때마침 백양나무 잎새를 흔드는 바람,

이미 한 번 스쳐간 인연들도

우수수거리는 소리만 있어, 그 소리만으로도

저 노인, 온몸 사무치게 물살치곤 한다.

그러니 생은 얼마나 깊고 푸르른 것인가.

어깨에 맨 삽이 몇십 개 닳도록

평생을 파보아도 그러나 회한과 뉘우침뿐,

다만 강물은 유장하고 산은 우뚝해선

강으로 오늘을 씻고 산으로 내일을 세웠느니,

적막강산, 들어서는 산집 마당에

오늘처럼 또 금빛노루가 맑은 눈망울로

저 노인의 귀가를 기다린 적도 있긴 있다.





독거노인       /전성호



구름 타고 산을 넘는, 피붙이들 모이는 추석

혼자 지키는 옛집이 감나무 그림자보다 무료하다

북쪽 하늘 바라보던 밤의 눈동자

차가운 길바닥 뒹구는 신문지 속

'버려진 부모' 앞에서

자신의 하얀 체온, 잉크 냄새 사라진 문자를 읽고 있다



뜰을 지키고 선 대추나무 잔가지 사이

날카로운 풀벌레 울음소리

별빛은 옷깃을 파고들고

돌아올 이 없는, 돌아갈 일만 남은 가슴에

핏빛 감입만 나풀거린다



이젠 지상에 수분이 다하는 갈수기

가을 냇물도 감나무 뿌리까지 가닿지 않고

먼 하늘 쏘아올린 불꽃처럼

늙은 고양이 한마리 하늘 향해 울음 울고





노인의 가을 연정    /만수 강한익

휘영청 밝은
한가위 보름달
닫힌 가슴 활짝 열어
고이 모셔놓고

코스모스 꽃 지어
검은 가시 돋아나면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낙엽을 살포시 밟으며
오신다는 사랑 하는 임이여 !

칠순 노인 얼굴에
주름살 깊게 그리는데
어느 곳에 깊은 사랑
뿌리내렸는지
오실 줄 모르는구나,

칠흑의 어둠 속
행여 길 잃으실까
오시는 길
둥근달 꺼내 들고
훤히 비추어
발걸음 가볍게 하려는데

귀뚜라미 풀 벌레
서글피 우는 가을밤
그리운 임
오신다는 기별이 없어
고운 옷 치장한
아름드리 고목에
아픈 사연 하소연한다.





노인의 아침       /신 진



마른기침 일어나

어둠의 자투리들을 갠다

쿨럭쿨럭 삽자루 일어나고

눈곱재기 닦으며 털복숭이 한 마리 뛰쳐나온다

몽당 털복숭이 논두렁길 앞장을 서면

밤새 물을 지고 기다렸던 풀들이

노인의 발등에 한 바가지씩 물을 부리고 간다

샛바람 불어 노인의 이마에서 새로 체온을 짚고

복숭아뼈를 타고 쇄골까지 물 기운 오르는 동안

노인은 물꼬 다지고 피 싹 몇 건진다

논바닥 흙의 숨소리 여기저기 모이고 흩어지고

찌르레기 소리 내며 재잘거린다

아침은 부신 개밥그릇 만지듯 살갑고 낯이 익다

들판 여기저기 바투 돛을 올리는

농투성이들의 목선들, 여어- 여어-

또 하루 함께 지냈구나

받는 이 없어도 저마다의 무사함을 알리고 있다

일평생 칭송 받은 일 없고

알레스카며 앙코르와트며 멀리 가 본 적 없으나

넘길 것 죄 넘기고 남았나니

다시 밝는 날이 짐 되지 않다

툇마루 너머 산이며 들이며 한없이 몸을 푼다

강아지 새삼 다가와 노인의 발등에 몸을 비비고

볕살 알뜰히 날아다니며 젖은 삽날 말린다

털복숭이와 둘이 맞는 툇마루의 아침 밥상

홰나무 가지 사이 샛별조차 기웃거리니

오늘은 갈 때 아니라고 하루 더 쉬다 가자고

몽당 털복숭이 폴짝폴짝 뛰어오르며

주둥이 입에 문지르며 조르고 있다





노인에게 경고한다     /은석 김영제



늙은 것은 자랑이 아니외다

경로석이라고 무조건 앉지 마소

늙은 것도 급수가 있나니

허리 구부러진 형 지팡이의존 형 올백발 형

그리고 60대 이상 형 등이 있거늘

자기네도 양보 안하면서

젊은 사람 앉았다고 나무라지 말라.



경로석이라 특별 귀빈석 공짜로 타서

따스한 온돌같은데서 백프로 앉아가니

이거 완전 신선놀음 아닌가

그래놓고는 장애자가 타면

스르르 눈감아 외면하면서

옆사람 툭툭치는 그 싸가지는 무엇이요?



출근시간에 등산 간다며 올라 타고는

두리번 두리변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지 마소

당신같은 노인들 땜에 내가 젊었어도 자리양보 못하겠소

우린 눈비비며 간신히 일 나가는데 당신은 룰루랄라

놀러가지 않소 난 그게 기분 나쁘오.





어느 노인의 끝자락       /돌샘 이길옥

- 미리 본 자화상 -



자정도 훨씬 넘은 시각

어둠 묻힌 적막 속에서

한을 꺼내어 어금니로 으깨는 노인의 눈에

뜨겁게 솟는 눈물로 빠진 별빛이

탈색되고 있었다.

맥 풀린 빛이 뜨겁게 데워지며

몸서리치고 있었다.

노인의 쭈글쭈글한 삶의 껍데기도

함께 녹아들고 있었다.

그렇게 노인은 어둠을 타는데 익숙해져

굼벵이 움질거림으로

살아 있음을 확인이라도 하듯

꿈틀거리다가

몸에 묻은 오싹한 한기를 털어내느라

몸서리 한 번 치고서

누군가 빨다가 버리고 간 꽁초에 불을 붙이는

잠깐 동안의 불기에 잡힌 노인이 윤곽이 사라지고

떨리는 손에 잡힌 꽁초의 마지막이

노인의 명줄을 잡아끌고 있었다.

곱게 키운 자식들의 구박과 외면만

가득 담은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통한을 어둠으로 감추고

노인은 꿈틀

살이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한 뒤

한이 풀릴 날이 언제인 줄도 모르면서

서서히,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어르신이 사는 나라    /이영지



어르신 오늘도 잘 주무셨습니까
날씨가 춥네요
너무 추운 날에는 바깥에 나가지 마시고
방안을 두루두루 다니시고
왔다 갔다 하시고

따뜻한 방안에서
화안한 창문쪽으로
얼굴을 들어 화안한 빛을 받으셔요

우리나라는 참 좋은 나라에요
어른이라는 말이 바로 가장 높은 분이라네요

어른을 모시는 나라에서
든든히 잡수시고
아침저녁으로
아들딸들 문안을 받으시고

- 어른이라는 말이 히브리어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신명기 32장 8절



2023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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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목원

권승섭

버스를 기다린다 신호가 바뀌고 사람이 오가고
그동안 그를 만난다

어디를 가냐고
그가 묻는다

나무를 사러 간다고 대답한다

우리 집 마당의 이팝나무에 대해 그가 묻는다

잘 자란다고
나는 대답한다

그런데 또 나무를 심냐고 그가 묻는다

물음이 있는 동안 나는 어딘가 없었다
없음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무슨 나무를 살 것이냐고 그가 묻는다

내가 대답이 없자
나무는 어떻게 들고 올 것이냐고 묻는다

나는 여전히 말이 없다
먼 사람이 된다

초점이 향하는 곳에 나무가 있었다

잎사귀로는 헤아릴 수 없어서

기둥으로 그루를 세야 할 것들이
무수했다

다음에 나무를 함께 사러 가자고
그가 말한다

아마도 그 일은 없을 것이다

언젠가 그를 나무라 부른 적이 있었는데

출처 : 《2023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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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문

권영유

개기월식이라는 뉴스에 옥상으로 가본다
붉은 달이 초콜릿 듬뿍 묻힌 초코파이 같다
한 입 베어 문 그때

평화동에 산 적 있다 절취선 같은 골목 따라가면 노인이 돋보기안경으로 거스름돈 꺼내주던 구멍가게가 나왔다 초코파이 한 상자 어김없이 한 봉지씩 우물거리는 밤 별들도 그 부스러기였다 네가 갈래? 내가 갈까? 자매끼리 서로 떠넘기다 마지못해 사러갔던 그 가게, 초코파이만큼은 늘 채워져 있었다 날마다 야금야금 갉아먹는 열다섯, 빈 봉지 털어보듯 용돈도 털려갔다 속을 채우고 담아도 늘 고팠던 그때의 정은 오직 초코파이

오리온자리를 찾아본다
그 자리 뜯어보면
열 두 개의 촉촉한 정이 있다

출처 : 《2023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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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고양이

김현주

손끝에 떨어진 작은 눈물 한 조각에
지구 반대편 수만 년 전의 빙하가 서서히 녹고 있다

흩어지는 만년설 사이로 사파이어처럼 빛나는 파란 눈동자
작게 너울거리는 심장소리가 빼꼼히 나를 올려다본다
휘둥그랑 투명한 수염을 휘날리며
다정히 나의 세계에 뛰어들었던 고양이는
지금 어디쯤 있을까

강렬한 축문처럼 나를 감싸던 고양이가 사라진 지금
나는 달빛 한 조각의 자비도 없는 세상에 포위되었다
언제쯤 돼야 이 지긋지긋한 것들로부터 탈출할 수 있을까
무쇠 신을 끌며 터벅터벅 걸어가는 길고 긴 북극의 밤에는
길도 없고 이정표도 없고 고양이도 없다

가시처럼 불행의 취기만 가득 담은 냉담한 숨결을 통과하며
영원히 끝나지 않는 밤을 지난다
쇄빙선도 깨지 못한 얼음에 갇혀
일각고래와 청새치 바다거북이 가라앉은 심해 한가운데를
혼자 일렁이는 밤

천리라도 따라가고 만리라도 따라간다는
낯익은 이별가에 목이 메인다
동그랗게 떠있는 그곳을 향해
차가운 유빙과 얼어붙은 별들을 데리고 간다
먼지처럼 부서져 내리며 솟아오르는

나, 또는 고양이라는 세계

출처 : 《2023 경향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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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소

김현주

올라가는 것을 동경한 적이 있나요
덜컥 파랗던 하늘이 정지 영상으로 멈추기 직전까지
가장 먼 곳을 밟기 바로 전
힘차게 발을 뻗는 것과
마음을 멀리 두는 건 또 다른 일이라
어디를 향해 올라가는지 물어본 적이 없어요
롤러코스터와 대관람차를 탈 때
목적지를 묻지 않는 것처럼
오래전 죽은 나무로 만든
시소 위에 앉아서 말이에요
놀이터는 높이에 묶인 유배지
멀리 떠나지 못한 놀이들이 박혀 있어요
아이들은 숲보다 낮은 그네를 타고
얕은 철봉을 돌아 둥글게 떨어져 내리죠
눈이 없는 기린과 입 벌린 녹색의 악어 사이
차가운 높낮이로 기울어지는 그림자 속에서도
물이 흐르고 빛은 형체를 그려요
어둡게 올라가는 나는 짧은 시간의 끝에서
당신보다 더 빨리 늙어가는 중입니다
하지만 가끔,
내려가 보는 거예요
동그랗게 짓이겨진 이끼의 위치 아래
녹슨 용수철과 나비의 날개
매몰된 습지가 자유롭게 부유하며 떠오르도록
발 디딤이 없는 한 칸마다
당신을 향한 깊이가 높이로 기화하고
비명처럼 자라는 어린 잎들이
밤새 날고 있다는 착각으로 웅성거리도록
당신이 내리면 허공,
나는 어느새 제한된 공중으로 떠오릅니다

출처 :《 2023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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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가 되어 가는 풍경

김혜린

물레 위에서 점토를 돌린다
선생님은 마음의 형태대로 도자기가 성형된다고 말했다
점토가 돌아가는 물레가 있고
물레는 원을 그린다
물레가 빚어내는 바람이 원의 형태로 부드럽게 손을 휘감는다

생각하는 동안 점토는 쉽게 뭉그러지고
도자기는 곡선이지만 원은 아닌 형태로 성형된다
가끔 한쪽으로 기울고 일그러진다

그러는 동안 창밖의 개들은 풀밭 위를 빙글빙글 돈다
꼬리를 쫓으며 도는 개의 주변으로 풍경이 둥글게 말린다
부드럽고 단단한 개의 몸속에서 튀어나오려 하는 수백 개의 동그라미들

개들을 보면 사람은 마음속으로 무엇을 그리며 사는지 궁금해졌다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잘 재단된 옷을 입고
같은 사이즈의 길을 걷는다

지도를 보지 않아도 언젠가 집으로 연결되는 길에서
길을 잃는 방법을 잃어버린 동네에서
구획이 잘 나누어진 길을 직선으로 가로지른다

어느새 공원은 개들이 풀어놓은 동심원으로 가득 찬다

나는 원을 그리는 법을 배운다
꼬리에 시선을 두고 여백에 시선을 두고 선에 시선을 두고

시선을 한 곳에 집중하면 더 많이 돌 수 있다
넘어지지 않을 수 있다

누군가 내 손끝과 반대쪽 손끝 사이의 거리를 잰다
선은 아름답게 구부러져 있다

원이 아닌, 모든 곡선을 그리고 있다

아직 백자가 어떤 모형으로 구워질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나는 정성 들여 유약을 칠한다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길에서
여기가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은
희고 맑다

어느새 풍경은 백자가 되어 있다

출처 : 《2023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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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착

노수옥

오전에 내린다는 비는
오후가 되어서야 쏟아졌다
아마도 우산들의 모의가 있었지 싶다

몇몇 우산의 후예는 지구 밖으로 날아갔다. 활짝 펴졌다. 그리고 다시 우기를 살피고 비의 입자를 감지했다. 가끔은 지구 밖에서도 비가 내린다고 빗소리 같은 잡음을 전송해 왔다

비는 늘 시시각각을 벗어난 적이 없다 어느 곳에서든 정시를 고집하지 않고 습도의 비율을 찾아다녔다.

연착이 없는 태양과 달,
단호한 날짜마다 태양과 달의 봉인 도장이 찍혀 있다

비가 내리는 동안 지상의 나무는 그늘을 따돌리고 잠깐 자란다. 타설된 오전에서 오후의 빗방울 화석이 발견되었지만 그건 인류의 역사를 밟고 지나간 거인의 발자국과 같은 과정일 것이다.

느닷없이 쏟아진 소나기는 저 아랫마을에 가서 깊어졌다

끊긴 오전에서 오후를 넘어온 시내버스 운전사는 연착을 설명하느라 바쁘고 왼손쯤에서 사라졌던 태양이 오른손에서 발견되었다.

이유 불문, 태어나는 일에는 연착이 없지만 태몽은 연착이 있다

약속은 대부분 내려야 할 곳을 놓친 사람의 입장이 아니다
중간에 교차로가 있고
속도의 결렬이 있고
아직 분실이
바닥에 닿지 못하는 이유다

출처 : 《2023 광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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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터

박선민

추우면 뭉쳐집니다
펭귄일까요?

두 종류 온도만 있으면
버터는 만들 수 있습니다
뭉쳐지는 힘엔 추운 거푸집들이 있습니다
마치 온도들이 얼음으로 바뀌는 일과 흡사합니다
문을 닫은 건 오두막일까요?

마른나무에 불을 붙이면
그을린 자국과 연기로 분리됩니다
창문 틈새로 미끄러질 수도 있습니다
문을 꽉 걸어 잠그고 연기를 뭉쳐줍니다
고온에 흩어지는 것이 녹는점과 비슷합니다
초록색은 버터일까요?

버터는 원래 풀밭이었습니다몇 번 꽃도 피워 본 경험이 있습니다
어떤 목적들은 집요하게도 색깔을 먹어 치웁니다
이빨에 파란 이끼가 낄 때까지
언덕과 평지와 비스듬한 초록을 먹어 치웁니다
당나귀일까요?

홀 핀이 물결을 반으로 가릅니다
개명 후 국적을 바꾼 귤이 있습니다
노새는 두 마리입니다
한쪽의 양이 너무 많거나
갑자기 차가운 밖으로 밀려나면
두 개의 뿔이 돋아납니다
그래서 당나귀의 울음은 무게를 느끼지 못합니다
저울의 일종일까요?

버터는 뜨거운 프라이팬의 바닥에서 녹습니다
녹기 전에는 잠시
사각의 모양이었습니다
다방면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만
책상과 주로 이별에 쓰이는 인사를 닮기도 했습니다
안녕일까요?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안녕의 모양은 제각각이라
한평생 뒤집어도 맞는 짝을 연속해 찾기란 어렵습니다
자신과 다른 모양을 가진 인사에
분명 트집을 잡고 있을 것입니다
부서졌군, 다른 말로 교체해달라는 뜻입니다
삐뚤어졌군, 새 말로 달라는 뜻이고요

밀항선을 타고
전 세계로 스며들었습니다
버터 한 덩어리에는 항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난파된 배에서 떨어져 부유하다가 유빙처럼 발견된 버터도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 유빙이 가로지른 국경선을 분석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랜 시간에 걸쳐
버터가 녹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창문일까요?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버터가 사각인 이유는
창문에 넣고 굳혔기 때문입니다
악천후를 뚫고 달리는 창문은
격렬한 속도입니다

출처 : 《2023 경향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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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빌레 의 소沼로 간 소

안시표

섬 노을이 바다를 펼치면 다락빌레 벼랑 속으로
거친 숨결 하나, 하늘로 간 沼에 소가 있었지
도시의 아파트 한 채처럼 송아지를 분양받은 큰어머니
차양 넓은 햇살이 작은 어깨에 내려앉아
들판의 하루가 감투로 숨 차오를 때
다락빌레 한가운데 沼의 잘근잘근 대는 소리에 잠시 쉬어가고는 했지
하양 떠밀려 오는 벼랑 파도 소리가
무성한 파동을 이끌고 수초의 혼을 빼놓을 때
개구리 숨죽이며 알 낳은 소리, 공기 방울로 터져 나오고
진흙 물뱀 꼬리는 바람의 온기를 감추며 저물어 갔지
어디선가 장수풍뎅이 물가에 지문 찍듯 沼 지천을 쿵쿵 울리며
소의 발굽 소리 다가올 적, 겁 없이 손에 쥐어진 버들 막대 하나
물가에 비친 늙은 호박 같은 엉덩짝을 찰싹 내리치고는 했어
목을 축이는 소의 울음 곁, 하얀 목덜미를 씻는 큰어머니의 환한 하루가
이렇듯 흘러가는 어진 눈매에
느려도 천 리를 가는 황소의 콧김으로
점점 沼와 뜨겁게 맞닿던 어느 여름날이었어
꿈결 沼에 비친 낮달을 사각사각 베어 물다
생이가래 속으로 툭 떨어진 이빨을 찾으려 손을 집어넣던 딸애
간질대는 물뱀에 울면서 깨어난 다락빌레엔
종일 비가 내렸고
웃자란 풀을 쫓다 벼랑 아래로 큰어머니의 황소는 별안간 떨어졌지
바다는 굵어지는 빗소리에 큰어머니 상혼(喪魂)의 궁핍을 남기고
그 해, 무른 콜타르 감정이 다락빌레 沼를 자르니
쭈욱 뻗어나간 신작로에 소금 핀 마른 눈물만 번져갔어
서쪽 돌 염전 따라 빌레의 명치끝을 밟으면 다락쉼터 표지석을 만날 수 있어
바람 부는 날 이곳에 서면 수평선 너머로 간 큰어머니의 황소가
아직도 沼의 잘근잘근 대는 소리를 씹으며
바다로 터져나간 신음을 삼키는 것 같아 먹먹해지고는 해

출처 : 《2023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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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의 추억

이상록

기억의 성채도 언젠간 무너지지만 내 인생극장은 막을 내릴 수 없다네

삼팔장은 파장 흐느끼는 뽕짝 무대래야 장터 마당 우리는 들뜨지 학교에선 기죽던 강둑 아래 녀석도 나방처럼 설치지 노란 등 꺼지고 영사기 소리 밤하늘 긁으면 어김없이 죽죽 장대비 내리지 매가리 없는 삶 눈물처럼 때도 없이 내리지 사랑해선 안 될 사람 통통배는 서울로 가는데 소나무에 기대 바라만 보는 여인 아, 문 희, 눈물도 예쁜 저런 여자라면 삶이 한두 번 속여야지 그래도 지금 여자 갸름한 목덜미는 꼭 닮았다네

촌구석에 극장이라니 거무죽죽 지붕 사이 우뚝한 국제극장 김일 박치기를 단체로 볼 줄이야 허장강도 도금봉도 막걸리 안주 희갑이는 애들도 만만하게 보는데 장돌뱅이로 돌고 돈 필름은 장꾼들 셈처럼 자꾸만 끊어져 하필 두 입술이 닿을 찰나에 건달들 ‘도끼’ 고함에 다시 이어져도 꼴도 보기 싫은 놈 자르고픈 컷, 컷, 정말 도끼로 뭉툭 도려내고 사는 맛도 있어야지 ‘한 떨기 장미 꽃잎이 젖을 때’라나 아직도 콩닥거린다네

범일동 시궁창 강구 군단도 촌놈 부산 구경 못 막았지 가무잡잡 삼화고무 앳된 처자들 삼일극장이 비좁네 뽕도 딸 겸 들어서면 분내 땀내 찐득거려 삼성극장으로 건너가면 지린내가 폴폴 따라붙지 헛헛하지 액션으로 한 방 멜로로 또 한 방 동시에 달래주곤 남진까지 불러다 구장집 봉순이 봉긋한 가슴에 바람 넣더니 바람과 함께 사라진 봉순인 태화고무 고무신처럼 어디서 질기게 살아갈 테지 그 보림극장도 문을 닫았다네

출처 : 《2023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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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볼트

임후성


코끼리를 보라

코끼리끼리는 볼 수 없는 코끼리를 보라
꼬리를 위해 서 있는 네 번째와 세 번째 다리를 보라
걸음을 뗄 때 발을 남기고 벗겨질 것만 같은 발의 접힌 거죽을 보라
달라붙어 있지 않고
그것은 끌려다닌다
우리의 난제였던 바깥이다
실체는 헐렁헐렁하다
그 안에서 기관을 해체하는 망치질 같은 코끼리의 걸음을 보라
눈앞에 직접 정의된 코끼리를 보라
걸을 때마다 부서지고 있지 않은가
간신히 어금니로 연결되어 있지만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지 않은가
코끼리 안으로 들어가지 마라
안과 바깥은 서로에게 통증이 그지없다

뒤쪽 숲을 보라
나뭇잎들이 가지에 붙어 벌어졌다 오므라들었다 한다
나무 주위를 맴돌며 탈출이 어려운
바람의 원숭이들을 보라
가장 가까운 붉은색을 볼 수 없는 원숭이의 눈을 보라
저 영특한 종족은 의혹의 못에 박힌 매혹이다
이때 고개를 돌려 완전한 불의 형태로 시간을 태우는 대관람차를 보라
오전의 하품 같은 간격을 보라
회전의 무의미 아래 네게 권해지는 네 머릿속을 보라

주차장에서 마주친 사 년 전 그 사람을 보라
하천이 흐르는 대로변에서
다리 아래로 유혹해
교량의 접합부마다 극렬하게 박힌 볼트를 해가 질 때까지 함께 보았던 그 사람을 보라
볼트 하나를 빼 보고 싶었던 그 사람을 보라
그가 너를 찾아 나섰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볼트 하나를 갖고 있다
그와 상관없이 혼자서 한 번 더 다리를 건너라
다리는 흔들거린다
그 아래를 보라
조그만 구멍을 남기고 녹슨 생략이 있다

출처 : 《2023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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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끓이다

장현숙

책은 책마다 맛이 다르다

초록 표지의 책에선 식물의 맛이 나고 지구에 관한 책에선 보글보글 빗방울 소리가 나고 어류에 관한 책에선 몇천 년 이어온 강물 소리가 난다

곤충에 관한 책에선 더듬이 맛이 나, 이내 물리지만

남쪽 책장은 마치 텃밭 같아서 수시로 펼쳐볼 때마다 넝쿨이 새어 나온다 오래된 책일수록 온갖 눈빛의 물때와 검정이 반들반들 묻어있다 두꺼운 책을 엄지로 훑으면 압력밥솥 추가 팔랑팔랑 돌아간다

침실 옆 책꽂이 세 번째 칸에는 읽고 또 읽어도 설레는 연애가 꽂혀 있다 쉼표와 느낌표 사이에서 누군가와 겹쳐진다 그러면 따옴표가 보이는 감정을 챙겨 비스듬히 행간을 열어놓는

새벽까지 읽던 책은 바짝 졸아서 타는 냄새가 났다

책 속에 접힌 페이지가 있다는 건 그 자리에서 눈의 불을 켜야 한다는 것, 무엇보다도 일기장이 제일 뜨겁다 그 안에는 태양이 졸아들고 별이 달그락거리면서 끓기 때문이다

책을 끓여 식힌 감상을 하룻밤 담가 놓았다가
여운이 우러나면 고운 체로 걸러내야 한다
그 한술 떠 삼키면
마음의 시장기가사라진다

출처 : 《2023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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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켜다

조이경

가위바위보를 할 때도 주먹을 내야겠어요
오늘이 새나가지 않도록

블랙 미러 속 환삼덩굴이
투명한 손을 뻗어오네요
엄지와 검지의 잔뿌리를 싹둑 자르고
포레스트 어플*을 켭니다
여기는 역설의 숲, 숲지기는
가위로 가위를 잘라야 해요
비탈진 모래 언덕에
곰발바닥선인장을 심어볼까요
보송보송한 솜털에는
지문이 닳지 않겠죠

천천히 흘러내리는 모래시계를 샀지요
시간의 나무는 백색소음을 먹고 자란대요

건조한 수요일이 명상을 클릭합니다
함께 심기에 당신을 초대할게요
다달이 선물로 주던 데이터,
이젠 꽃과 나무로 주세요 코인이 쌓이면
낙타의 무릎에도 종려나무를 심어요. 우리

눈을 감고 날숨을 길게 내쉽니다
마른 흙이 빗방울에 놀라 소스라치네요
불모의 한때가 비늘처럼 떨어져 내립니다

코끝을 스치는 흙내음
내일은 집을 지을 거야
수목 한계선 밖에서 울고 있던
야명조夜鳴鳥 한 마리,
가문비나무숲으로 날아듭니다
가문비나무에선 사철 물소리가 들려요
극지의 바람에는 비의 씨앗이 들어 있나 봐요
바람의 숨결에 집중하며
주먹을 풀지 않는 나무
고요히 겨울을 완성한 가문비나무는
악기의 맑은 공명共鳴이 되죠

새에게서 저녁을 삭제하자
발톱이 새로 돋아났어요
여문 실핏줄을 뽑아 시간의 나이테를 그려요
파랗게 녹명鹿鳴을 풀어놓아요

*스마트폰을 보지 않고 계획한 일에 몰두한 시간만큼 숲에 나무가 자람.??

출처 : 《2023 전라매일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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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는 7번 국도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

최주식

부산데파트 앞 버스정류소는 7번 국도의 시작 또는 종점
우리집은 종점이었어 산7번지 처음 보는 마이크로버스가
똑같이 생긴 집에서 똑같이 생긴 아이들을 실어 날랐어
똑같은 책가방을 메고 똑같은 학교에서 똑같이 생기지 않은
한 여자아이를 좋아하던 어느 날 내가 전학 온 것처럼
그 아이도 전학을 가버리고 나는 인생이 무언가 오면
가는 것이라고 비정한 것이라고 잡을 수 없는 것이라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하루는 종점에서 시작되었어
아침이면 늘 신발이 젖었어 밤새 파도가 다녀간 거야
파도는 7번 국도를 타고 온다고 그래서 종점에 내려
처음에 이상했던 일이 계속 일어나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아
아무도 도망치지 못한 하루가 말라비틀어진 화분 사이로 걸어가면
아저씨 제발 화분에 물 좀 주세요 글쎄 파도가 화분만 적시지 않는구나 공허한 대답처럼 버스가 다시 오면 젖었다 마른 행주처럼
종점에서 시작되는 아침 젖은 신발을 신고 다니면 세상이 질척거려
자꾸 달아나고만 싶어 7번 국도를 달리면 바다를 볼 수 있을거야
파도를 만나면 내 젖은 신발을 두고 올거야 다시는
젖은 신발을 신지 않을 것이라고 똑같이 생기지 않은
여자아이를 닮은 다 큰 여자가 국수를 마는 집을 나선 날
종점에 버스는 한 대도 없었어

출처 : 《2023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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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는 7번 국도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

최주식

부산데파트 앞 버스정류소는 7번 국도의 시작 또는 종점
우리집은 종점이었어 산7번지 처음 보는 마이크로버스가
똑같이 생긴 집에서 똑같이 생긴 아이들을 실어 날랐어
똑같은 책가방을 메고 똑같은 학교에서 똑같이 생기지 않은
한 여자아이를 좋아하던 어느 날 내가 전학 온 것처럼
그 아이도 전학을 가버리고 나는 인생이 무언가 오면
가는 것이라고 비정한 것이라고 잡을 수 없는 것이라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하루는 종점에서 시작되었어
아침이면 늘 신발이 젖었어 밤새 파도가 다녀간 거야
파도는 7번 국도를 타고 온다고 그래서 종점에 내려
처음에 이상했던 일이 계속 일어나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아
아무도 도망치지 못한 하루가 말라비틀어진 화분 사이로 걸어가면
아저씨 제발 화분에 물 좀 주세요 글쎄 파도가 화분만 적시지 않는구나 공허한 대답처럼 버스가 다시 오면 젖었다 마른 행주처럼
종점에서 시작되는 아침 젖은 신발을 신고 다니면 세상이 질척거려
자꾸 달아나고만 싶어 7번 국도를 달리면 바다를 볼 수 있을거야
파도를 만나면 내 젖은 신발을 두고 올거야 다시는
젖은 신발을 신지 않을 것이라고 똑같이 생기지 않은
여자아이를 닮은 다 큰 여자가 국수를 마는 집을 나선 날
종점에 버스는 한 대도 없었어

출처 : 《2023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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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낮은 곳의 말言

함종대

발톱은 발의 말이다
발은 한순간도 표현하지 않은 적이 없지만
나는 낮은 곳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짓눌리거나 압박받는 곳에서 나오는 언어는 어감이 딱딱하다
그렇다고 낮은 곳 아우성이 다 각질은 아니어서
옥죈 것을 벗겨 어루만지면 이내 호응한다
늦은 퇴근 후 양말을 벗으면
탈진하여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발가락들이 하는 말을 더럽다고 외면한 날이 많았다
안으로 삼킨 말이 발등으로 통통 부어오른 날도 있었다
어둠 속에서 나에게 내미는 말을
나는 야멸차게 잘라내며 살았구나
오늘은 발을 개울에 데려간다
물은 지금 머무는 곳이 가장 높은 곳이라
말하지 않아도 속내를 아는 양
같은 족을 만난 듯 온몸으로 감싸 안는다
발이 내어놓는 울음인지 물의 손길인지
분간할 수 없는 감정이 봄나무에 물오르듯 올라온다
머리를 낮게 숙여 두 손으로 발을 잡아본다
참아왔던 눈물을 쏟아냈는지 볼까지 흠뻑 젖었다
개울이 발의 울음소리까지 보듬는 걸 보면
오래전부터 산의 발등이나
나무들의 발가락을 어루만져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개울도 울컥거릴 때가 있어 강에 발을 담근다
바다는 말 안 해도 다 안다는 듯 하구를 보듬는다
장사가 어려워 가게를 폐업하던 날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뭍의 등을 철썩철썩 쓸어내린다

출처 : 《2023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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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이 웃는다

백숙현

인도 여행에서 돌아온 친구가 담배를 돌렸다
담배에서 녹차 맛이 났다
가볍고 부드러운 음악이 흘렀다 연기처럼 가벼워지고 싶었다
외투를 벗었다
양말을 벗었다
묶었던 머리를 풀어헤치고 스카프를 휘날리며 춤을 추었다
친구들이 킥킥대며 웃어댔다
그들을 향해 탁자에 있던 귤을 던지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머리에 명중하자 웃음소리가 더 높아졌다
벽이 눈물을 흘렸다
깨진 귤들이 바닥에 뒹굴었다
창문은 창문
탁자는 탁자
술잔은 술잔
귤은 귤
그러므로 나는 나
브래지어를 벗어 던졌다
도마와 밥솥을 집어 던졌다
저울과 모래시계와
금이 간 거울
때묻은 경전과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던졌다
담배 한 개비 다 타들어 가도록
나는 던져버릴 게 너무 많았다

*가브리엘 가르세아 마르케스의 소설

출처 : 《2023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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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에 대하여

데레사

애인은 여당을 찍고 왔고 나는 야당을 찍었다
서로의 이해는 아귀가 맞지 않았으므로 나는 왼손으로 문을 열고
너는 오른손으로 문을 닫는다

손을 잡으면 옮겨오는 불편을 참으며 나는 등을 돌리고
너는 벽을 보며 자기를 원한다

악몽을 꾸다 침대에서 깨어나며 나는 생각한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애인을 바라보며 우리의 꿈이 다르다는것을

나는 수많은 악몽 중 하나였지만 금방 잊혀졌다

벽마다 액자가 걸렸던 흔적들이 피부병처럼 번진다
벽마다 뽑지 않은 굽은 못들이 벽을 견디고 있다

더는 넘길 게 없는 달력을 바라보며 너는 평화,
말하고 나는 자유, 말한다

우리의 입에는 답이 없다 우리는 안과 밖
벽을 넘어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나를 견디고 너는 너를 견딘다

어둠과 한낮 속에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티브이를 끄지 않았으므로 뉴스가 나오고 있다

출처 : 《2023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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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마을이 설원이 되는 동안

이예진

금값이 올랐다

언니는 손금을 팔러갔다

엄마랑 아빠는 이제부터 따로 살 거란다

내가 어릴 때, 동화를 쓴 적이 있다 내가 언니의 숙제를 찢으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언니도 화가 나서 엄마의 가계부를 찢었고 엄마는 아빠의 신문을 찢고 아빠는 달력을 찢다가,
온 세상에 찢어진 종이가 눈처럼 펄펄 내리며 끝난다

손금이 사라진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집에 남고 싶은 것은 정말로 나
하나뿐일까? 언니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더는 찢을 것이 없었다 눈이 쌓이고 금값이 오르고 검은 외투를 꽁꽁 여민 사람들이 거리를 쏘아 다녔다

엄마는 결국 한 돈짜리 목걸이를 한 애인을 따라갔지 아빠는 한 달에 한 번 서울에 오겠다고 했다

따로 따로 떨어지는 눈과

따로 노는 낡고 지친 눈빛을

집이 사라지고 방향이 생겼다

출처 : 《2023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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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아이스 결혼기념일

민소연

평생 함께하겠습니다
짙은 약속을 얼떨결에 움켜쥐었을 때
새끼손가락 끝에 검붉은 피가 모였을 때

치밀한 혀를 가지게 될 거라는 걸 알았다
어떤 밤엔 마침내 혀를 쓰지 않고도 사랑을 발음했다

맺혔던 울음소리가 몇 방울 떨어지고
태어나고

수도꼭지를 끝까지 잠갔다
한밤중엔 그런 소리들에 놀라서 문을 닫았다
너무 규칙적인 것은 무서웠다 치열하게
몸을 움직이는 초침 소리나
몸을 웅크린 채 맹목적으로 내쉬는 너의 숨소리가 그랬다

거듭 부풀어 오르는 뒷모습을 보면서 호흡을 뱉었다
어쩌면 함께 닳고 있는 것 같았다
박자에 맞춰 피어오르는 게 있었다 입김처럼
희뿌옇고 서늘했다

숨을 삼키다 체한 밤이면 너를 깨웠다
내기를 하자고 했다
누가 더 먼저 없어질 것 같은지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해보자고 했다 너와 나는 모두
내가 먼저일 거라는 결론을 내려서

우리는 오래도록 같은 편이 되었다
내가 죽은 척을 하면 너는 나를 끌어안았다
서로의 등 뒤에서 각자의 깍지를 움켜쥐었다
영원한 타인에 대해 생각했다
손끝에 짙은 피가 뭉치면

동시에 숨을 전부 내쉬었다

품안에서 녹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살갗이 들러붙었다

출처 : 《202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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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로 영화

이진우

서른 다섯 번을 울었던 남자가 다시 울기 시작했을 때 문득 궁금해집니다
사람이 슬퍼지려면 얼마나 많은 복선이 필요한지
관계에도 인과관계가 필요할까요
어쩐지 불길했던 장면들을 세어보는데
처음엔 한 개였다가 다음엔 스물한 개였다가
그 다음엔 일 초에 스물네 개였다가 나중엔 한 개도 없다가
셀 때마다 달라지는 숫자들이 지겨워진 나는
불이 켜지기도 전에 서둘러 남자의 슬픔을 포기해버립니다
이런 영화는 너무 뻔하니까
안 봐도 다 아는 이야기니까
이 사이에 낀 팝콘이 죄책감처럼 눅눅합니다
극장을 빠져나와 남은 팝콘을 쏟아 버리는데
이런 영화는 너무 뻔하다고
안 봐도 다 아는 이야기라고
누군가 중얼거립니다
이런 얘기들은 등뒤에서 들려오곤 하죠
이런 이야기들의 배후엔 본 적도 없는 관객을 다 아는 세력이 있죠
문득 다시 궁금해집니다
뻔한 것들엔 아무 이유도 없는지
안 봐도 안다는 말에 미안함은 없는지
우리의 관계는 상영시간이 지난 티켓 한 장일 뿐이므로
텅 빈 극장엔 불행과 무관한 새떼들이 날아다니고 있을테지만
그것들은 다른 시간대로 날아가지 못합니다
가끔 이유 없이 슬픈 꿈을 꾸기도 합니다 사랑하고 있을 때도 그랬습니다

출처 : 《202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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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차수현

환상적인 날씨입니다 혀 내밀고 내달리기에
나는 줄을 당겨 바람을 가릅니다 간신히 기어 나오는 웃음

좋은 날입니다
죽어 가는 사람 목줄 채우기에

느껴봐 온통 살아 있는 것 투성이야
냄새만 맡아도 꿈틀대는 흙, 돌, 풀, 눈 뜬 벌레, 죽은 자의 혀가 잘린 그림자,
산 사람의 입을 뗀 발자국 그곳에서 영靈을 찾는 발자국 발자국들

천사 같은 아이들이 하나둘 따라붙어 나팔을 붑니다
터져버릴 풍선 같은 주인 여잘 놓칠세라 나는 줄을 힘껏 당깁니다

봄눈의 생사가 움찔대는 건 입춘이 지나서라지

마지막 의자에 앉아 잠시 쉬어가는 노파가 말합니다

검은 새들이 나란히 나란히 그 중, 유일한 흰 새 한 마리 보입니다
검은 눈들이 나란히 나란히 그 중, 유일한 흰 눈 한 알 보이지 않습니다

유일한 ㅁ ㅗ ㄱ을 그었거든요

달리는 남자 위로, 만보 걷는 여자 위로, 쌩 지나가는 자전거 위로,
갑자기 우산을 펴는 여학생 위로 뚝 뚝

서둘러 서둘러야 했어
나는 더 이상 당겨지지 않는 바람을 가릅니다
그처럼 깨끗하게 죽은 사람 처음 봤다지 어찌나 핥아줬는지
얼굴이 말갛더래 봄꽃 마냥
주인 여자와 어깨를 부딪친 노파가 입을 뗍니다

자,
당신의 앞발을 들어보세요
그리고 서둘러 두드리세요 그녀가 사는 옆집 대문을

똑 똑 똑 산책할 시간입니다

출처 :《2023년 경남도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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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커밍데이

이진우

이름을 부른 것도 아닌데
여름이 온다

어른이 되기도 전에 벌써
우리가 상상도 못했던 감각들이 유빙처럼 떠내려갔지
애인을 기다리며 마시는 커피의 얼음이 녹는 속도라든지 그 사람과
이별한 후 마시게 될 맥주의 온도라든지
우리는 우리의 이마와 코끝이 얼마나 가까운지도 알지 못했지
앨범에 넣어둔 사진이 눅눅해지는 건지도 몰랐지
그때 네가 입고 있던 반팔 티는 무슨 색이었나
벽지에 말라붙은 모기의 핏자국을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장마처럼 햇볕이 쏟아진다
운동장엔
새로 자란 그림자들이 무성하다
다음 여름도 그랬으면 좋겠다
여름이 오는데
여름에 죽은 친구의 얼굴이 기억나질 않는다

출처 : 《202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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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어

황사라

속이 보이지 않는 것은 싱싱해요
벌려지지 않는 조개는 살아 있는 거래요

나를 단단히 여미고 싶을 땐 시장에 가요

횟집 옆 원단가게 사장님은
둘둘 말아 놓은 천을 풀어 보여주시는데
아득한 바다가 출렁대는 줄 알았어요

바위에 붙어 있는 게 굴만 있겠어요
저기 좌판 한 자리에 앉아
수십 년 동안 곰피를 팔아 온 할머니
손등 위에 물결무늬가 깊게 새겨졌네요

흥정은 늘 미끄럽기 마련이지요
손안의 물고기처럼
자칫하면 놓쳐버리고 말아요

하루하루 쳐지는 나의 감정도
얼음조각으로 덮어놓으면
조금 더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바위에 수없이 부딪치면서도
제자리를 찾아가는 파도
물길을 잃은 적이 한 번도 없다는데요

골목의 해류를 따라가다 보면?
지느러미를 펄떡이는 물고기들

나는 잊었던 기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아요

출처 : 《2023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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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벚 보살

이수진

개심사 청벚나무 가지에 연둣빛 꽃이 눈을 떴다
얼마나 오래 기다려왔던 것일까
가지 하나 길게 내밀어 법당에 닿을 듯하다
꽃이 맑다
매화나무는 목탁 두드릴 때마다
꽃잎으로 법구를 읊고,
청매화는 동안거 끝에 심욕의 수피를 찢어
꽃망울 터트린다
저토록 신심(信心)을 다져왔기에
봄이 일주문에 들어설 수 있다
가지마다 허공으로 낸 구도의 길
제각각 가부좌 틀고 참선의 꽃들을 왼다
전각에서 내리치는 죽비소리
제 몸 쳐대며 가람으로 흩어지는 풍경소리
합장하듯 꽃잎들 맞이하고 있다
법당은 꽃들의 백팔배로 난분분하다
부처가 내민 손바닥에
청벚꽃잎 한 장 합장하듯 내려앉는다

이제 어렴풋이 나만의 시 짓게 됐다

출처 : 《2023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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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갓집

윤연옥

낡은 일기장에는
작은 파편들이 널려있고
가을이 데려 온 바람
놀다간 자리서 햇볕 냄새가 난다

툇마루서 뒹굴던 고슬한 추억
손바닥으로 만지고 쓸어보면
햇살처럼 보드랍고 따뜻해
속절없이 내려놓는 한조각 그리움

찬바람 불어 시린 속
일상 허기 달래면
동강 난 필름
마주보고 웃는다

장독대 항아리 속 웅크리고 있던 홍시
외할머니 손에서 단내를 풍기고
까치밥 쪼던 까치
한낮 풍경이 되다

꼬물대며 하냥 기어가는
사랑의 자취들
우화의 날갯짓 소리에
불빛 찬란하게 몸 바꾼 뜨락

가뭇없이 떠나가는
파편 한 조각 집어 들고
무심의 공덕이라
해조음에 하늘만 본다

출처 : 《2023년 동양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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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빙

윤계순

큰 강에 얼음이 얼 때
얼음은 일사불란하게 얼지 않는다
얼었다가 다시 무수한 조각으로 부서지길
몇 차례 반복한 다음에야
평평하고 두껍게 언다
단단한 것들은 경전(經典)의 고리처럼
파륵 파륵 넘겨지다가 다시 한 권으로 뭉친다
티베트 승려들의 논쟁엔 손뼉을 치는 주장이 있어
셀 수 없는 의견으로 나눠지고
다시 이어 붙는 합의
그런 일들의 끝에 큰 강은
하나의 얼음판으로 얼어붙는다
얇은 추위에 몇 겹의 추위가 달라붙고
쩡쩡 얼음 조각들의 합의가 밤을 울린 다음에야
흐름이 멈춰 서듯 얼어붙는다
그런 물도 추우면 저희끼리
쩡쩡 뭉치지만
분분한 의견의 투합이 겨울을 건너와
지탱했던 제 몸을 다시 풀면 봄이다
그러니 녹는 순서는 그저 얼음 밑
흐르는 속도에 맡겨두면 되는 일이다
햇살이 조각나는 일을 두고
나뭇가지들은 저의 일직(日直)인양 분분하지만
지상의 결빙이 풀려야 비로소
햇볕도 해동한다

출처 :《2023년 한국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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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등

김미경

당신처럼, M에게도 빈티지 공간 하나 있었죠 그때 M은 무척 어렸고, M을 업었던 등은 순하고 따뜻한 조도를 갖고 있었어요 잠투정하던 M이 눈물 콧물 번진 얼굴로, 그곳에다 새근새근 잠을 기대놓으면, 달빛도 베이지색 커튼을 수직으로 드리웠죠

그거 아세요
이 세상 어린 잠들은 모두 수직이 키웠다는 거

비밀스런 달의 뒤뜰도, 사다리타고 내려오듯 위에서 아래로 점점 깨어나고, 이따금 놀다가던 천왕성도, 목련꽃 켜 둔 그녀의 뒤란까지 따라왔던 초록 이파리도, 명지바람이 업어 키웠죠 달이 지구 그림자를 컬러로 인화해 준다는 뉴스가 뛰어다니던 날, M은 쓰러진 그녀를 업고 응급실로 달리던 중이었다는데요

건초처럼 가벼워진 그녀 몸이
M의 등에서 자꾸만 아래로 흘러내렸다는데요

그동안, 들판과 벼랑마다 피는 꽃이 달랐던 것도 다 그 이유였을까요 늙은 수직은 어린 수직 위에서 온전히 잠들기 어려웠을까요 그 등에는, 당신의 위급한 잠조차 기대기 아까웠던 걸까요

의사선생님 우리 엄마 좀 살려주세요.

응급실에 불안한 숨을 눕혀놓고서, 시든 파 같은 그녀 등이, 그믐달보다 어둡게 식어가는 걸 보았다는 M, 어떻게 알았는지 공중을 열고 문병 온 태양도, 가로보다는 세로의 언어로 토닥이다 가고, 달도 허공에 벽지처럼 서서 회복을 기다렸다는데요

M의 빈티지 침대는
꿈속에서, 울고 보채던 어린 벼랑을 등에 업은 채
신음하다 눈감았고요 숨진 침대를 상여가 -어영차 수거해갔죠

우리는 따뜻한 수직의 잠을 기억하는 족속들,
M을 본 건 며칠 후였습니다

잔뜩 웅크린 어깨로, 사망진단서 팔랑이는 손을 데리고 병원 앞 횡단보도를 건너가던, 그 앞을 스친 버스 안에는, 흔들리는 손잡이에 오늘 태어난 졸음을 기대놓은 사람들,

사람들이 저녁마다 집으로 향하는 것은, 자신의 등 어디쯤에 있는 벼랑 하나가, 어리거나 늙은 주인들을 애타게 부르기 때문, 당신이 퇴근하는 골목이 가끔씩 캄캄한 것도, 등에 업은 아기 깰까봐 가로등도 자는 척 눈감았기 때문이죠

출처 : 《2023 전남매일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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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일째

황정희

구 일째 울진 산불이 타고 있다

한 할며니가 우사 문을 열고
다 타 죽는다 퍼뜩 도망가래이 퍼뜩 내빼거라 꼭 살거라
필사적으로 소들을 우사 밖으로 내몰고 있다

불길이 내려오는 화면을 바라보며
밀쳐놓은 와이셔츠를 당겨 다린다

발등에 내려앉은 석양처럼 당신은 다가오려 했고
나는 내 발등을 찍어 당신이 집나간 지도
구 일째

주름진 당신의 얼굴이 떠올라 매매 반듯하게 기다리고 있다

똑 똑
똑똑 똑똑
똑똑똑똑똑똑

빗소리다

쏟아지는 빗소리가 진화를 몰고 와
우산을 쓰고 돌아온 당신 속으로 질주하는 나는 맨발

날 밝아
체육관으로 피했던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갔을 때
다 타버린 우사 앞에서 할머니를 기다리는 소들의 모습이 비쳤다

출처 : 《2023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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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가 되어가는 풍경

김혜린

물레 위에서 점토를 돌린다
선생님은 마음의 형태대로 도자기가 성형된다고 말했다
점토가 돌아가는 물레가 있고
물레는 원을 그린다
물레가 빚어내는 바람이 원의 형태로 부드럽게 손을 휘감는다

생각하는 동안 점토는 쉽게 뭉그러지고
도자기는 곡선이지만 원은 아닌 형태로 성형된다
가끔 한쪽으로 기울고 일그러진다

그러는 동안 창밖의 개들은 풀밭 위를 빙글빙글 돈다
꼬리를 쫓으며 도는 개의 주변으로 풍경이 둥글게 말린다
부드럽고 단단한 개의 몸속에서 튀어나오려 하는 수백 개의 동그라미들

개들을 보면 사람은 마음속으로 무엇을 그리며 사는지 궁금해졌다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잘 재단된 옷을 입고
같은 사이즈의 길을 걷는다

지도를 보지 않아도 언젠가 집으로 연결되는 길에서
길을 잃는 방법을 잃어버린 동네에서
구획이 잘 나누어진 길을 직선으로 가로지른다

어느새 공원은 개들이 풀어놓은 동심원으로 가득 찬다

나는 원을 그리는 법을 배운다
꼬리에 시선을 두고 여백에 시선을 두고 선에 시선을 두고

시선을 한 곳에 집중하면 더 많이 돌 수 있다
넘어지지 않을 수 있다

누군가 내 손끝과 반대쪽 손끝 사이의 거리를 잰다
선은 아름답게 구부러져 있다

원이 아닌, 모든 곡선을 그리고 있다

아직 백자가 어떤 모형으로 구워질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나는 정성 들여 유약을 칠한다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길에서
여기가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은
희고 맑다

어느새 풍경은 백자가 되어 있다

출처 : 《2023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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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에 든 사람

박장

손을 잡아야 잠을 잘 수 있었다. 방지턱을 넘는 버스. 내 키를 덮는 그림자. 엄마는 보이지 않고 내 손엔 엄마의 검지만 쥐여져 있었다.

눈 뜨면 구석일 때가 많았다.

나는 주문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버지의 면도기와 골프공, 설렁탕을 담는다. 여섯 살 때 내가 잃어버린 휴게소를 클릭한다. 얼굴의 푸른색은 휴대폰에 옮겨둔다.

산소에 간다. 캔커피와 꽃을 산다. 살수록 비굴해진다. 더 비굴해지기로 한다. 그렇게 주문을 건다. 주문은 많은 걸 해결해준다.

써보지 않은 양식의 글을 쓴다. 흰 봉투에 넣어 책상에 올려둔다. 이력서는 모두 폐기한다.

출처 :《2023 매일신춘문예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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