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모음

오탁번 시인의 시모음

뉴우맨 2023. 2. 16. 23:55

굴 비


- 오탁번-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장수가 지나갔다
―굴비 사려, 굴비!아주머니, 굴비 사요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둘러보았다
―그거 한 번 하면 한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며칠후 굴비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안 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빡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 불렀다

主:동인문학상 후보에 오른 작품


폭설(暴雪)
       오탁번-

삼동(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南道)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天地)가 흰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宇宙)의 미아(迷兒)가 된 듯 울부짖었다
―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



-오탁번-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나뭇가지마다 순은(純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내린 숲길에 멈추어 선
겨울 아침의 행인들.

원시림(原始林)이 매몰될 때 땅이 꺼지는 소리,
천년동안 땅에 묻혀
딴딴한 석탄(石炭)으로 변모하는 소리,
캄캄한 시간 바깥에 숨어 있다가
발굴되어 건강한 탄부(炭夫)의 손으로
화차에 던져지는,
원시림(原始林) 아아 원시림(原始林)
그 아득한 세계(世界)의 운반(運搬)소리.

이층방 스토브 안에서 꽃불 일구며 타던
딴딴하고 강경한 석탄(石炭)의 발언(發言).
연통을 빠져나간 뜨거운 기운은
겨울 저녁의
무변(無邊)한 세계(世界) 끝으로 불리어 가
은빛 날개의 작은 새,
작디 작은 새가 되어
나뭇가지 위에 내려 앉아
해뜰 무렵에 눈을 뜬다.
눈을 뜬다.
순백(純白)의 알에서 나온 새가 그 첫번째 눈을 뜨듯.

구두끈을 매는 시간만큼 잠시
멈추어 선다.
행인들의 귀는 점점 맑아지고
지난밤에 들리던 소리에
생각이 미쳐
앞자리에 앉은 계장 이름도
버스·스톱도 급행번호도
잊어버릴 때, 잊어버릴 때,
분배된 해를 순금(純金)의 씨앗처럼 주둥이 주둥이에 물고
일제히 날아오르는 새들의 날개짓.
지난 밤에 들리던 석탄(石炭)의 변성(變成)소리와
아침의 숲의 관련 속에
비로소 눈을 뜬 새들이 날아오르는
조용한 동작 가운데
행인들은 저마다 불씨를 분다.

행인들의 순수(純粹)는 눈 내린 숲 속으로 빨려가고
숲의 순수(純粹)는 행인에게로 오는
이전(移轉)의 순간,

다 잊어버릴 때, 다만 기다려질 때,
아득한 세계(世界)가 운반(運搬)되는
은빛 새들의 무수한 비상(飛翔) 가운데
겨울 아침으로 밝아가는 불씨를 분다.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청하, 1985








사랑 사랑 내 사랑

- 오 탁 번 -

논배미마다 익어가는 벼이삭이

암놈 등에 업힌

숫메뚜기의

겹눈 속에 아롱진다



배추밭 찾아가던 배추흰나비가

박넝쿨에 살포시 앉아

저녁답에 피어날

박꽃을 흉내낸다



눈썰미 좋은 사랑이여

나도

메뚜기가 되어

그대 등에 업히고 싶다










봄 /오탁번



겨우내 살이 오른 딱정벌레 작은 알이
봄 아침 눈을 뜨고 나무 밑둥 간질일 때
그리움 가지 끝마다 새잎 나며 보챈다

버들개지 실눈 뜨는 여울목 아지랑이
눈물겨운 물거울로 꿈결 속에 반짝일 때
이제야 견딜 수 없는 꽃망울이 터진다


















오탁번(吳鐸蕃, 1943년 7월 3일제천 ~ )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고려대학교 영문과 및 동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하였다.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1978년부터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였고,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이다.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하였다



주요 저서 작품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1985년, 시집)

생각나지 않는 꿈 (1991년, 시집

겨울강 (1994년, 시집

미터의 사랑 (1999년, 시집

처형의 땅 (1974년, 소설)

오탁번 시화 (1998년, 산문집

현대시의 이해 (1998년, 평론집)



오탁번시인의 시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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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탁번 시 모음

‘굴비’ 오탁번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장수가 지나갔다 ―굴비 사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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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탁번 시인의 대표 시 모음

굿 모닝/오탁번

아침 일찍 일어나면
화장실로 먼저 간다
강추위에 안녕한지
살피러 간다
물을 내리니, 쏴!
굿 모닝? 하니
굿 모닝! 하네

늙은 아내 잠자는
안방을 살짝 열어본다
문 여는 소리에
홱 돌아눕는다
꿈나라 잠보!
굿 모닝? 해도
굿 모닝! 안 하네




연애/오탁번

자가운전하는 예쁜 여자가
내가 달리는 차선으로
얌체같이 끼어들기하고는
차창 밖으로 흔드는 하얀 손을 보면
무 베어먹듯 그냥 한 입 물고 싶다
눈 마주치면 눈흘레나 하고 싶다
뒤에서 들이받을 생각 아예 말고
살가운 접촉사고나 내고 싶다
ㅡ지금쯤 고향의 억새밭 물녘에서는
무지개도 뛰어넘을 만한 힘센 황소가
녈비에 황금빛 털이 간지럽겠디

밤길에 잽싸게 끼어들기하고는
점멸등 깜박이며 달아나는 차를 보면
반딧불이가 반딧반딧 짝을 찾는 것 같다
나도 한 마리 반딧불이가 되어
하늬바람에 공중제비하고 싶다
홰친홰친하는 낚싯대 펴고
동동거리는 형광찌 불빛따라
얄미운 붕어 한 마리 잡고 싶다
ㅡ지금쯤 고향 집 지붕에는
하양 박꽃이 환하게 피어
은하수까지 다 물들이겠다




우리 시대의 시창작론/오탁번

시를 시답게 쓸 것 없다
시는 시답잖게 써야 한다
껄껄껄 웃으면서 악수하고
이데올로기다 모더니즘이다 하며
적당히 분바르고 개칠도 하고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똥끝타게 쏘다니면 된다
똥냄새도 안 나는
걸레냄새 나는 방귀나 뀌면서
그냥저냥 살아가면 된다
된장에 풋고추 찍어 보리밥 먹고
뻥뻥 뀌어대는 우리네 방귀야말로
얼마나 똥냄새가 기분 좋게 났던가
이 따위 처억에 젖어서도 안 된다
저녁연기 피어오르는 옛마을이나
개불알꽃에 대한 명상도
아예 엄두 내지 말아야 한다

시를 시답게 쓸 것 없다
시는 시답잖게 써야 한다
걸레처럼 살면서
깃발 같은 시를 쓰는 척하면 된다
걸레도 양잿물에 된통 빨아서
풀먹여 다림질하면 깃발이 된다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 된다

-벙그는 난초꽃의 고요 앞에서
『우리 시대의 시창작론』을 쓰고 있을 때
내 마빡에서 별안간
'네 이놈!'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만 연필이 뚝 부러졌다




폭설/오탁번


삼동(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天地)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宇宙)의 미아(迷兒)가 된 듯 울부짖었다
―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토요일 오후/오탁번

토요일 오후 학교에서 돌아온 딸과 함께
베란다의 행운목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일 세상사람 저마다 눈을 뜨고
아주 바쁘고 부산스럽게 몸치장 예쁘게 하네
하루일 하루공부 다 끝내고 중고생 관람가
못된 장면은 가위질한 그저 알맞게 재미난 영화
팝콘이나 먹으며 구경하러 가는 것일까
한주일의 일과 추억을 파라솔 접듯 조그맣게 접어서
가볍게 들고 한강 시민공원으로 나가는 것일까
매일 물을 뿌려 주어야 싱싱한 잎을 자랑하는
베란다의 행운목이 펼쳐 주는 손바닥만큼씩한 행복
토요일 오후의 우리집은 온통 행복뿐이네
세 살 난 여름에 나와 함께 목욕하면서 딸은
이게 구슬이나? 내 불알을 만지작거리며 물장난하고
아니 구슬이 아니고 불알이다 나는 세상을 똑바로
가르쳤는데 구멍 가게에 가서 진짜 구슬을 보고는
아빠 이게 불알이나?하고 물었을 때
세상은 모두 바쁘게 돌아가고 슬픈 일도 많았지만
나와 딸아이 앞에는 언제난 무진장의 토요일 오후
모두다 예쁘게 몸치장을 하면서 춤추고 있었네
구슬이나? 불알이나? 딸의 어릴 적 질문법에 대하여
아빠가 시를 하나 써야겠다니까 여중 2학년은
아니 아니 아빠 저를 망신시킬 작정이세요?
문법도 경어법도 딱 맞게 말하는 토요일 오후
모의고사를 열 문제나 틀리고도 행복하기만한
강남구에서 제일 예쁜 내 딸아
아이고 예쁜 것!




굴비 / 오탁번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장수가 지나갔다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둘러보았다
―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려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안 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박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 불렀다




鳴沙山 / 오탁번


명사산 아득한 모래바람 속에서
긴 잠을 주무시는
혜초 스님을 月牙泉으로 모셔다가
서울에서 가져온
마늘종 고추장 깻잎 안주 삼아서
곡차 몇 잔 마신다


스님의 잠동무 아주 잘해 온
사막의 계집들도 불러내어
꼭두서니빛 꽃을 피우는
낙타초 가에 앉혀두고
스님한테 옛 社稷의 흥망을 아뢴다


즈믄 해 동안 잠동무하면서
스님한테 살가운 간지럼 많이나 태운
양젖 냄새 나는 위구르 계집과
말젖 냄새 나는 흉노 계집이
정말 갸륵해
월아천 옥빛 물로 옥가락지 만들어
모래울음 보채는 손가락 손가락에
하나씩 끼워준다




밥냄새 1 / 오탁번


하루걸러 어머니는 나를 업고
이웃 진외가 집으로 갔다
지나다가 그냥 들른 것처럼
어머니는 금세 도로 나오려고 했다
대문을 들어설 때부터 풍겨오는
맛있는 밥냄새를 맡고
내가 어머니의 등에서 울며 보채면
장지문을 열고 진외당숙모가 말했다
-언놈이 밥 먹이고 가요
그제야 나는 울음을 뚝 그쳤다
밥소라에서 퍼주는 따끈따끈한 밥을
내가 하동지동 먹는 걸 보고
진외당숙모가 나에게 말했다
-밥 때 되면 만날 온나


아, 나는 이날 이때까지
이렇게 고운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태어나서 젖을 못 먹고
밥조차 굶주리는 나의 유년은
진외가 집에서 풍겨오는 밥냄새를 맡으며
겨우 숨을 이어갔다




厄막이鳶 / 오탁번


내내 썰매 타고 눈싸움만 하느라
색동 설빔은 그만 얼룩이 다 졌지만
정월 대보름 아침이 밝아오면
부럼을 깨물고 더위도 팔고
고드름 따먹으며 고샅길을 내달린다
저녁이 되어 보름달이 둥실 떠올라
온 동네는 白夜처럼 환해지고
돌담가 달집에 불을 놓으면
달집에 쌓인 생솔가지가 불타며
냄비 속 쥐이빨 옥수수 튀는 소리를 낸다


달빛이 눈처럼 희디희어
올 여름 장마 걱정하면서
방패연에 이름과 생일 또박또박 적는다
허릿대 대오리도 팽팽한 방패연에
하늘길 노자할 동전 한 닢과
누에고치를 매달아 불을 붙이고
얼레의 연줄 죄다 풀어서
厄막이 厄막이 외치며 연을 날린다


厄막이鳶은
제 목숨 다 하는 줄도 모르고
창과 방패 쥐고 출전하는 무사처럼
달빛 넘치는 하늘로 높이 날아오른다
불에 타는 고치가 마지막 잉걸처럼
공중에서 아스라이 깜박일 때
연줄이 툭 끊어지며
방패연은 되똥되똥 내 厄運을 싣고
까마득한 하늘길로 떠나버린다


厄막이鳶 하늘 높이 날아갔으니
구구단 받아쓰기 죄다 백점 맞고
키도 쑥쑥 자라서
올해는 보리고개 잘 넘어가면 좋겠다
불장난 많이 한 대보름 밤
잠이 들면
잣눈이 내린 고샅길을 지나
키 쓰고 소금 얻으러 가는 꿈을 꾼다




블랙홀 / 오탁번


같은 동네에 사는 이종택과 함께
白雲池 아래 放鶴里에 사는
초등학교 동창 김종명이네 집에 놀러갔다
멍석에 널린 고추가 뙤약볕 같이 따갑고
함석지붕에는 하양 박이 탐스러웠다
누렁이 한 마리가 마당에서
제 똥냄새 맡다가 꼬리를 쳤다
찰칵! 한 장 찍고 싶은
우리 농촌의 옛 풍경 속으로
재작년 추석 무렵에 무심코 쑥 들어갔다


안방에서 머리가 하얀 안노인네가 나왔다
어릴 때 친구 집에 놀러 가면
나는 어른들께 답작답작 큰절을 잘 했다
그러면 친구 어머니가 씨감자도 쩌주고
보리쌀 안쳐 더운밥도 해주곤 했다
-종명이 어머니가 여태 살아계시는구나!
나는 얼른 큰절을 하려고 했다


그 순간 몇 만 분의 1초의 시간이 딱 멈추었다
종명이가 제 어머니에게 말하는 소리가
우주에서 날아오는 초음파처럼
아득하게 들려왔다
-임자! 술상 좀 봐!
초등학교 동창 마누라에게 큰절할 뻔한 나는
블랙홀에 빠진 채 허우적거렸다


머리가 하얀 초등학생 셋은
무중력 우주선을 타고
저녁놀 질 때까지 술을 마셨다
-放鶴里에 왔으니 鶴 한 마리 잡아다가
안주로 구워먹자, 씨벌!
종택이와 종명이는 내 말에 장단을 맞췄다
-그럼 그렇고 말고지, 네미랄!
光速보다 빠르게 블랙홀을 가로지르는
鶴을 쫓아가다가
그만 나는 정신을 잃고
종택이 경운기에 실려 돌아왔다




감자밭 / 오탁번


흙냄새 향기로운 감자밭 이랑에
하양 비닐을 씌우는
농부 내외의 주름진 이마에는
따사로운 봄볕이 오종종하다
서방은 비닐을 앞에서 끌고
아낙은 뒤에서 그걸 잡고 있는데
비닐 끝을 흙으로 덮기도 전에
자꾸 앞으로 나가니까
소를 몰 때 하듯이 아낙이 말한다
-워! 워!
그 말을 듣고
서방이 씩 웃으며 한마디 한다
-워,라니?
흙을 다 덮은 아낙이 또 말한다
-이랴! 이랴!


신방에 들어가는 새댁처럼
가지런한 감자밭 아랑은
물이랑 되어 찰랑이는 비닐을
비단 홑이불처럼 덮고
제 몸을 어루만져주기를 기다린다
농부 내외는
바소쿠리에 가득한 씨감자눈을
비닐을 뚫고 하나하나 꾹꾹 심는다
멧돼지와 고라니들이 내려와
감자를 반나마 나눠 먹을 테지만
주먹만한 감자알을 떠올리며
새흙을 덮어 다독여준다
감자밭 이랑은
아기를 잉태한 새댁처럼
다소곳이 엎드린 채
감자알이 여무는
하짓날 긴긴 해를 꿈꾸고 있다




작별 / 오탁번

오늘 아침 그대들과 작별하고 싶다
꿈꾸며 바라본 설핏한 저녁 노을
진토닉에 몸을 푸는 빨간 체리
서해바다 노을 한강까지 밀어올리며
얼음 밑에서 겨울을 나는 누치 한 마리
그대들과 선선히 작별하고 싶다
미끈미끈한 비늘도 모두 흩어지고
목마른 입술 닿은 종이컵도
재활용 봉투 속에서 잠들고 있다
첨탑에서 종소리 아득해질 때마다
내 눈썹 시리게 한
생애의 벼랑도
뜨거운 알코올 목구멍에 쏟아
나의 욕망 연소시킬 불씨도
이젠 그만 사그라지면 좋겠다
아무리 불러봐야 메아리도 없는 아침
떠나간 빈 자리 메워줄 슬픔 하나로
텅 빈 자리에 호젓이 남고 싶다
면도한 두 볼에 스킨로션 바르고
구겨진 넥타이로 목을 감고
죽어가는 관절 일으켜 세워
그대들과 절뚝거리며 작별하고 싶다


여기쯤에서 / 오탁번

여기쯤에서 그만 작별을 하자
눈뜨고 사는 이에게는
생애의 벼랑은 언제나 있는 법
거기 피어 있는 이름 모를 풀꽃
하나 따서 가슴에 달고
뜻 없는 목숨 하나 따서
만났던 그 자리 그 어둠 앞에
우리의 죄로 젖어 있는 추억을 심고
그만 여기쯤에서 작별을 하자
똑같은 항아리가 어느 한쪽에
깨어져서 들어가야 한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도 아니다
우리의 입술은 아침저녁 비가 오고
내 몸에 묻어 있는 눈썹 하나
머리칼 한 올이 나의 새벽까지
따라와서 죄를 짓자고 속삭인다 해도
너의 찬 손이 뜨거워지고
나의 안경이 흐려진다해도
말 하지마, 아무 말도 하지 마
작별을 하자 그만 여기쯤에서 생애의
벼랑에서 뛰어내려 젖은 입술을
입술에 부비며 말하지마, 아무 말도 하지 마


汽車 / 오탁번

할머니가 부산하게 비설거지하고
외양간 하릅송아지도 젖을 보챌 때면
저녁연기가 아이들 복숭아뼈 적시며
섬돌 아래 고샅길로 낮게 퍼졌다
숙제 끝내고 토끼풀도 다 뜯어다주고
심심해서 사물사물해졌을 때
산 너머 기차 소리가 들려오면
몽당연필에 마분지 공책 들고
아이들은 앞산 등성이로 달려갔다
까치발 암만해도 기차는 보이지 않고
두엄더미 지렁이울음처럼
기차소리만 치치포포 하릿하게 들렸다
기차를 한번도 본 적이 없지만
귀를 모으고 기차소리 들으며
재바르게 기차 그림을 그렸다
여물통 같은 기차, 달구지 같은 기차!
개다리소반 같은 기차, 바소쿠리 같은 기차!
아이들은 기차소리를 그리며
멀고먼 나라로 가는 기차표를 끊었다
손에 쥔 기차표 하뭇해하며
아득한 미리내 여울 건너듯
저녁연기 밟으며 돌아올 때면
깜깜해진 비구름이 빗방을 흩뿌리며
쏭당쏭당 개찰하듯 기차표를 적셨다


감자밭 / 오탁번

흙냄새 향기로운 감자밭 이랑에
하양 비닐을 씌우는
농부 내외의 주름진 이마에는
따사로운 봄볕이 오종종하다
서방은 비닐을 앞에서 끌고
아낙은 뒤에서 그걸 잡고 있는데
비닐 끝을 흙으로 덮기도 전에
자꾸 앞으로 나가니까
소를 몰 때 하듯이 아낙이 말한다
-워워!
그 말을 듣고
서방이 씩 웃으며 한마디 한다
-워, 라니?
흙을 다 덮은 아낙이 말한다
-이랴! 이랴!

신방에 들어가는 새댁처럼
가지런한 감자밭 이랑은
물이랑 되어 찰랑이는 비닐을
비단 홑이불처럼 덮고
제 몸을 어루만져주기를 기다린다
농부 내외는
바소쿠리에 가득한 씨감자눈을
비닐을 뚫고 하나하나 꾹꾹 심는다
멧돼지와 고라니들이 내려와
감자를 반나마 나눠먹을 테지만
주먹만한 감자알을 떠올리며
새흙을 덮어 다독여준다
감자밭 이랑은
아기를 잉태한 새댁처럼
다소곳이 엎드린 채
감자알이 여무는
하짓날 긴긴 해를 꿈꾸고 있다




사랑의 깊이 / 오탁번


너를 떠나보내고 돌아오는 길에도
어둠의 깊이만큼 비애가 끝간 데 없었다.
만나면 만날수록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고
어쩔 수 없이 젖어드는 그리움의 얼굴

바람이 불고 눈이 오고 또 꽃이 피고
천둥 번개 요란한 새벽마다 눈을 뜨고
너의 옷을 하나씩 벗겼다 알몸에 알몸을
가까이하고 여름 여치가 날개를 비벼대며 울 듯

너를 떠나보내고 돌아오는 길에는
사랑의 깊이만큼 우수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별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더욱 빛나는
너의 흰 손 흰 이마 가슴 적시는 눈물 방울




겨울강 / 오탁번

겨울강 얼음 풀리며 토해내는 울음 가까이
잊혀진 기억 떠오르듯 갈대잎 바람에 쓸리고
얼음 밑에 허리 숨긴 하양 나룻배 한 척이
꿈꾸는 겨울 홍천강 노을빛 아래 호젓하네
쥐불 연기 마주 보며 강촌에서 한참 달려와
겨울과 봄 사이 꿈길 마냥 자욱져 있는
얼음짱 깨지는 소리 들으며 강을 건너면
겨울나무 지피는 눈망울이 눈에 밟히네
갈대잎 흔드는 얼음속에 가는 눈썹 숨기고 잠든
아련한 추억이 버들개지 따라 실눈을 뜨네
슬픔은 슬픔끼리 풀려 반짝이는 여울 이루고
기쁨은 기쁨끼리 만나 출렁이는 물결이 되어
이제야 닷 올리며 추운 몸뚱아리 꿈뜰대는
겨울강 해빙의 울음소리가 강마을을 흔드네


백두산 천지 / 오탁번

솟구쳐 오른 백두산 멧부리들이 온뉘 동안 감싸안은
드넓은 천치가 눈앞에 나타나는 눈깜박할 사이
그 자리에서 나는 그냥 숨이 막힌다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백두산 그리메가
하늘보다 더 푸른 천지에 넉넉한 깃을 드리우고
메�은 우레소리 지나간 여름 한나절
아득한 옛 하늘이 내려와 머문 천지 앞에서
내 작은 몸뚱이는 한꺼번에 자취도 없다.
내 어린 볼기에 푸른 손자국 남겨 첫 울음 울게 한
어머니의 어머니 쑥냄새 마늘냄새 삼베적삼
서늘한 손길로 손님이 든 내 뜨거운 이마 짚어두던
할머니의 할머니가 백두산 천지 앞에 무릎 꿇은 나를
하늘눈 뜨고 바라본다 백두산 멧부리가 누리의
첫 새벽 할아버지의 흰 나룻처럼 어렵고 두렵다.


배추흰나비 / 오탁번

호수보다 더 잔잔한 기다림으로
저녁 노을 지는 그리운 하늘아래
배추흰나비처럼 날아다녔다.
저녁 새 깃드는 먼 숲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나무 아래 이끼를 기르듯
그렇게 수많은 아픔으로
갑자기 구름이 몰려오고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얼굴
보고싶은 눈썹 날리는 머리칼
양 한마리가 초원으로 멀리 숨듯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흐려지는 눈앞에 밟히는
눈 코 입 귀 머리칼
나무숲보다 더 그윽한 그리움으로
이슬방울조차 무서운 배추흰나비처럼
지금 나는 날아오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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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탁번 시인님의 시 모음.  


백두산 천지  

1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가까워 장백소나무 종비나무 자작나무 우거진 원시림 헤치고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순례의 한나절에 내 발길 내딛을 자리는 아예 없다 사스레나무도 바람에 넘어져 흰 살결이 시리고 자잘한 산꽃들이 하늘 가까이 기어가다 가까스로 뿌리 내린다 손톱만한 하양 물매화 나비날개인 듯 바람결에 날아가는 노랑 애기금매화 새색시의 연지빛 곤지처럼 수줍게 피어있는 두메자운이 나의 눈망울 따라 야린 볼 붉히며 눈썹 날린다 무리를 지어 하늘 위로 고사리 손길 흔드는 산미나리아재비 구름국화 산매발톱도 이제 더 가까이 갈 수 없는 백두산 산마루를 나 홀로 이마에 받들면서 드센 바람 속으로 죄지은 듯 숨죽이며 발걸음 옮긴다  

​2  

솟구쳐 오른 백두산 멧부리들이 온뉘 동안 감싸 안은 드넓은 천지가 눈앞에 나타나는 눈 깜박할 사이 그 자리에서 나는 그냥 숨이 막힌다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백두산 그리메가 하늘보다 더 푸른 천지에 넉넉한 깃을 드리우고 애꿎은 우렛소리 지나간 여름 한나절 아득한 옛 하늘이 내려와 머문 천지 앞에서 내 작은 몸뚱이는 한꺼번에 자취도 없다 내 어린 볼기에 푸른 손자국 남겨 첫 울음 울게 한 어머니의 어머니 쑥 냄새 마늘냄새 삼베적삼 서늘한 손길로 손님이 든 내 뜨거운 이마 짚어주던 할머니의 할머니가 백두산 천지 앞에 무릎 꿇은 나를 하늘눈 뜨고 바라본다 백두산 멧부리가 누리의 첫 새벽 할아버지의 흰 나룻처럼 어렵고 두렵다  

​3  

하늘과 땅 사이는 애초부터 없었다는 듯 천지가 그대로 하늘이 되고 구름결이 되어 백두산 산허리마다 까마득하게 푸른 하늘 구름바다 거느린다 화산암 돌가루가 하늘 아래로 자꾸만 부스러져 내리는 백두산 천지의 낭떠러지 위에서 나도 자잘한 꽃잎이 되어 아스라한 하늘 속으로 흩어져 날아간다 아기집에서 갓 태어난 아기처럼 혼자 울지도 젖을 빨지도 못한다 온 가람 즈믄 뫼 비롯하는 백두산 그 하늘에 올라 마침내 바로 서지도 못하고 젖배 곯아 젖니도 제때나지 못할 내 운명이 새삼 두려워 백두산 흰 멧부리 우러르며 얼음 빛 푸른 천지 앞에 숨결도 잊은 채 무릎 꿇는다  

​                /[1미터의 사랑](1999)/  


밥냄새


하루 걸러 어머니는 나를 업고
이웃 진외가 집으로 갔다 지나다가 그냥 들른 것처럼
어머니는 금세 도로 나오려고 했다
대문을 들어설 때부터 풍겨오는
맛있는 밥냄새를 맡고
내가 어머니의 등에서 울며 보채면
장지문을 열고 진외당숙모가 말했다 ​
-언놈이 밥 먹이고 가요
그제야 나는 울음을 뚝 그쳤다
밥소라에서 퍼주는 따끈따끈한 밥을
내가 하동지동 먹는 걸 보고
진외당숙모가 나에게 말했다 ​
-밥때 되면 만날 온나
아,나는 이날 이때까지
이렇게 고운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태어나서 젖을 못 먹고
밥조차 굶주리는 나의 유년은
진외가 집에서 풍겨오는 밥냄새를 맡으며
겨우 숨을 이어갔다


봄날


젊은 날 술집에서
유두주乳頭酒 마시며 희떱게 논 적 있다 위스키 잔에다
아가씨 젖꼭지 담갔다가
홀짝 단숨에 마시고는
팁으로 배춧잎 뿌린 적 있다
독한 위스키에 취한
오디빛 젖꼭지의
도드라진 슬픔은 모른 채
내 젊음의 봄날이
깜박깜박 반짝이는 불빛에
만화방창 활짝 핀 적 있다  

이순耳順 지나 종심從心이라
일락서산 끄트머리에서
콧속 유두종乳頭腫 수술을 받았다
이비인후과에 난생처음 가서
내시경 진찰을 받았는데
콧속에 딱 젖꼭지 모양으로 생겨먹은
혹이 있었다
수술받고 내내 코피를 쏟다가
문득 젊은 날 마신
유두주가 떠올랐다
그때 그 아가씨의 젖꼭지가
콧속으로 들어와서
숨을 막으며 벌주는 것일까
유두주 죗값 치르는
피 흐르는 봄날!


알요강


풍물시장 좌판에 놓인
작은 놋요강 하나가
흐린 눈을 사로잡는다
명아주 지팡이 짚은
할아버지는
그놈을 닁큼 산다
기저귀만 떼면
손자를 도맡아 키워준다고
흰소리 하도 했으니
미리 알요강 하나 마련한다  

내년 이맘때나
손자가 기저귀를 떼겠지만
문갑 위에 모셔 놓은
배꼽뚜껑도 예쁜
알요강에서는  

벌써 향긋한 지린내가 난다
손자 오줌 누는 소리도
아주 잘 들리는
동지섣달
긴긴밤


굴비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 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 장수가 지나갔다
-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 수염을 한 굴비 장수는
뙤약볕 들판을 휘 돌아보았다
- 그거 한 번 하면 한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 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말했다
- 앞으로는 안 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박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 불렀다


하관(下館)  

이승은 한줌 재로 변하여
이름 모를 풀꽃들의 뿌리로 돌아가고
향불 사르는 연기도 멀리멀리
못 떠나고
관을 덮은 명정의 흰 글자 사이로
숨는다
무심한 산새들도 수직으로 날아올라
무저미재는 물소리가 요란한데
어머니 어머니
하관의 밧줄이 흙에 닿는 순간에도
어머니의 모음을 부르는 나는
놋요강이다 튓마루끝에 묻힌
오즘통이다 오줌통에 비치던
잿빛 처마 끝이다
이엉에서 떨어지던 눈도 못뜬
벌레다
밭두럭에서 물똥을 누면
어머니가 뒤 닦아주던 콩잎이다 눈물이다
저승은 한줌 재로 변하여
이름 모를 뿌리들의 풀꽃으로 돌아오고


비백 (飛白)  

콩을 심으며 논길 가는
노인의 머리 위로
백로 두어 마리
하늘 자락 시치며 날아간다  

​깐깐 오월
모내는 날
일손 놓은 노인의 발걸음이
호젓하다  

☆ 오탁번 시인은 충청북도 제천(堤川)출생이다.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재학 중이던 1966년에 동화 당선, 1967년에 시 당선, 1969년에 소설 당선이라는 신춘문예 3관왕(三冠王)의 화려한 등단(登壇)의 이력(履歷)을 갖고 있다(김은자 시인을 아내로 둔 시인 커플로도 유명한데, 김은자 시인도 신춘문예 2관왕 출신이다).  

시인은 고려대학교 학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는 전공을 국문학으로 바꿔 석사, 박사학위를 받고 모교에서 교수로 재직하였다.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1969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소설로 등단하였다. 시인협회장을 역임하였으며 한국문학작가상, 동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시집으로 <손님> <우리 동네>  <시집보내다> <알요강> <비백> 등이 있다.  

******


뵈러 간다는 말을 해놓고 여차저차 미루고 있다가 이제서야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제천의 서쪽에 위치한 원서문학관, 폐교된 작은 분교에서 노후를 보내고 계신다.
집에서 읽고 있던 선생님 책을 가져가 사인을 받고 차 한 잔으로 짧은 시간 동안 머물렀다.
나올 때 하신 말씀,
"요즘 내가 시를 두 편 썼는데 이제껏 쓴 시 중 가장 맘에 들어요. 아니,, 혼자만 그렇다는 거에요..."
팔십인 연세에도 불구하고 시작을 멈추지 않는 열정이 아름다웠다.
오래 건강하기를 바라는 마음 뒤로하고
폐사지를 혜국 스님께서 창건한 곳으로 알려진 충주 석종사를 들렀다. 스님께서 쓰신 심신명을 읽고도 깨달음의 공부는 멀기만 하였다. 기회가 된다면 발걸음 해 보리라는 생각이 있었던 곳.
대웅전에서 내려다보는 산세가 가경이다. 마당 한가운데 약수로 더위를 식히고 하늘을 보니 부풀어 오르다가 풀어지는 구름이 가을을 품고있다. 그러고 보니 며칠 후면 처서다.  

지금은 하루가 문을 닫으려
사물이 흑색으로 번져가는 시간
풀벌레 소리 애잔하다.

<동국정운>에서 集字한 원서문학관 정문석, 배운다의 의미인 '학'에는 ㅎ이 두 개 쓰였다고 설명해주셨다.



시인의 어머님


교실 세개 중 하나, 단체 손님들이 오시면 강의도 하셨다는 곳.






석종사 대웅전에서 내려다 본 풍경.




이 우물 없었으면 무지 힘들었을 뻔했다. 기립성 빈혈로 눈이 아팠는데... 물은 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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