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모음

임보의 시 모음

뉴우맨 2022. 12. 10. 07:22



임보(林步) 시 모음





1◈ 덕장

파도를 가르던 푸른 지느러미는

뭍에서는 아무 쓸모없는 장식,

대관령의 허공에 걸려 있는 명태는

거센 바람의 물결에 화석처럼 굳어 간다



내장을 통째로 빼앗기고 코가 꿰인 채

일사분란하게 매달려 있는 동태,

등뼈 깊숙이 스민 한 방울의 바닷물까지

햇볕과 달빛으로 번갈아 우려낸다



눈보라에 다 뭉개진 코와 귀는 이제

물결의 냄새와 소리를 까맣게 잃었다

행여 수국의 향수에 젖을까 봐

밤의 꿈마저 빼앗긴 지 오래다



그렇게 면풍괘선(面風掛禪)으로 득도한 노란 황태,

이놈들이 비싼 값으로 세상에 팔려나간다

요릿집의 북어찜,

제사상의 북어포,

술꾼들의 북어국…



겨울

서울역 지하도에

신문지를 덮고 누워 있는

덕장 아래 떨어진 낙태(落太)들





2 ◈ 검은등 뻐꾸기의 울음

네 마디로 우는 저 울음소리

사람의 음성과는 달리

자음과 모음으로 분리되지 않아

문자로 옮길 수가 없다



흔히

“홀딱 벗고, 홀딱 벗고”운다 하지만

어찌 들으면

“첫차 타고, 막차 타고”하는 것도 같고

“언잖다고, 괜찮다고”하는 것도 같다

또 어떤 이는

“혼자 살꼬, 둘이 살꼬” 한다고도 하고

“너도 먹고, 나도 먹고” 한다고도 한다



듣는 이에 따라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다



만어를 품고 있는

저 무궁설법

누가 따라 잡을 수 있단 말인가



3 ◈ 닭

닭들에겐 모이를 주는 손이 있어

굶주릴 염려는 없다

그러나 그 때문에 날개를 잃고

드디어는 그 손에 목이 비틀린다





4◈ 늙음

눈 어둠은 보기를 탐내지 말라는 뜻

귀 먹음은 듣기를 탐내지 말라는 뜻

이 빠짐은 먹기를 탐내지 말라는 뜻

잠 없음은 덧없이 꿈꾸지 말라는 뜻



5◈ 씨

껍질을 벗기면 다시 또 껍질

껍질을 벗기면 다시 또 껍질

양파의 씨가 어디 있느냐고?

네가 벗기는 그것이 바로 씨다



6◈ 궁합宮合

차가운 내 이마

따스한 그대의 손





7◈ 염소

섬에 배가 닿자

맨 먼저 달려와 반기는 이는

한평생 수평선만 이고 살던

수염이 긴 흑발의 노인



8◈ 노치老癡

썩은 뼈다귀 한 점 놓고 아귀다툼인

대머리 독수리놈들에게 혀를 찼더니

오늘의 내 몰골이 이에서 멀지 않구나

청맹과니로다, 부끄러운 이 지명知命이여





8 팬티



☞ 문정희의 <치마>를 읽다가



그렇구나.

여자들의 치마 속에 감춰진

대리석 기둥의 그 은밀한 신전.

남자들은 황홀한 밀교의 광신들처럼

그 주변을 맴돌며 한평생 참배의 기회를 엿본다



여자들이 가꾸는 풍요한 갯벌의 궁전,

그 남성 금지구역에 함부로 들어갔다가 붙들리면

옷이 다 벗겨진 채 무릎이 꿇려

천 번의 경배를 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런 곤욕이 무슨 소용이리

때가 되면 목숨을 걸고 모천으로 기어오르는 연어들처럼

남자들도 그들이 태어났던 모천의 성지를 찾아

때가 되면 밤마다 깃발을 세우고 순교를 꿈꾼다



그러나 여자들이여. 상상해 보라

참배객이 끊긴.

닫힌 신전의 문은 얼마나 적막한가!



그 깊고도 오묘한 문을 여는

신비의 열쇠를 남자들이 지녔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보라.

그 소중한 열쇠를 혹 잃어버릴까 봐

단단히 감싸고 있는 저 탱탱한

남자들의 팬티를!



9◈ 사월



도대체 이 환한 날에

누가 오시는 걸까



진달래가 저리도

고운 치장을 하고

개나리가 저리도

노란 종을 울려대고

벚나무가 저리도 높이

축포를 터뜨리고

목련이 저리도 환하게

등불을 받쳐 들고 섰다니



어느 신랑이 오시기에

저리도 야단들일까?



10◈ 바보 이력서

친구들은 명예와 돈을 미리 내다보고

법과대학에 들어가려 혈안일 때에

나는 영원과 아름다움을 꿈꾸며

어리석게 문과대학을 지원했다



남들은 명문세가를 좇아

배우자를 물색하고 있을 때

나는 가난한 집안에서 어렵게 자란

현모양처를 구했다



이웃들은 새로운 터전을 찾아 강을 넘어

남으로 갔을 때

나는 산을 떨치지 못해 추운 북녘에서

반평생을 보냈다



사람들은 땅을 사서 값진 과목들을 심을 때

나는 책을 사서 몇 줄의 시를 썼다



세상을 보는 내 눈은 항상 더디고

사물을 향한 내 예감은 늘 빗나갔다

그래서 한평생 내가 누린 건 무명과 빈곤이지만

그래서 또한 내가 얻은 건 자유와 평온이다.





11◈ 사랑법

한 사람의 가슴에

당신의 향기를 심어

빛나는 꿈을 가꾸게 하는 것은

당신의 시(詩)다



그러나

한 사람의 심장에 불을 붙여

밤새워 잠 못 이루게 한 것은

당신의 죄악이다



그러나 그러나

한 사람이 그의 전 생명을 던져

당신에게 추락해 오도록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은 이미

신(神)이다.



12◈ 돌의 나이

어느 고고학 박사가

땅 속에서 석기를 하나 찾아냈다

몇 만 년 전 것이라고 했다



길을 가다 나도

돌멩이 하나 집어들었다

몇 백만 년 전의 것이 아닌가?



13◈ 사람의 몸값

금이나 은은 냥(兩)으로 따지고

돼지나 소는 근(斤)으로 따진다



사람의 몸값은 일하는 능력으로 따지는데

일급(日給) 몇 푼 받고 일하는 사람도 있고

연봉(年俸) 몇 천만으로 일하는 사람도 있다



한 푼의 동전에 고개를 숙이는 거지도 있고

몇 억의 광고료에 얼굴을 파는 배우도 있다



그대의 몸값이 얼마나 나가는지 알고 싶은가?

그대가 만일 몇 백의 돈에 움직였다면

몇 백 미만이요

몇 억의 돈에도 움직이지 않았다면

몇 억 이상이다



14◈ 대竹

누에가 그 맑은 몸으로

은사銀絲의 가는 실을 뽑아내듯

대는 그 빈 몸으로 소리의 실을 뽑아낸다



그것을 못 믿겠거든

달이 밝은 밤 잠시

대 밭에 나가 홀로 서 있어 보시라

아가의 손 같은 작은 댓잎들이

서로가 서로를 어루만지며

흰 달빛에 맑은 바람을 걸어

얼마나 신묘한 소리를 짜내는지



그래도 못 믿겠거든

저 단소나 대금의 가락을 들어보시라

대의 몸에서 풀려나온

영롱한 소리의 실에

그대의 귀가 깊이 묶이지 않던가?



대가 몸을 그렇게 비운 것은

한평생 자신이 빚은 소리의 실타래를

그 속에 담아 두기 위함이다.



15◈ 손의 행적

어떤 손은 계산기를 두들기고

어떤 손은 염주를 굴린다

칼과 창을 벼리는 손도 있고

삽과 호미를 빚는 손도 있다

한때는 화투를 쥐던 손이

한때는 붓을 잡기도 한다

올무를 놓는 손도 있고

오라를 푸는 손도 있다

진주를 찾으려 시궁창을 헤집기도 하고

목숨을 걸고 폭탄의 뇌관을 열기도 한다

밤에는 은밀한 살을 더듬던 손이

낮에는 거룩한 경전을 펼치기도 한다.



16◈ 바람을 몰고 가는 소녀

높다란 둑길을 빨간 자전거 하나 굴러갑니다

하얀 원피스의 목련꽃이 핸들을 잡았습니다

신명나게 굴러가는 바퀴가 바람을 일으켜

짧은 치맛자락이 펄럭입니다



아니. 목련꽃 치마 밑이 궁금한지

앞에 있던 바람들이 달려와 치마를 자꾸 들춥니다

길가 수양버들 실가지들이 흔들흔들 합니다

개울에 있던 왜가리도 목을 길게 빼고 두리번거립니다



앞산 숲 속 어디선가 뻐꾸기도 조급히 울고

늙은 농부도 빠진 이를 드러낸 채

허수아비처럼 멍하니 논 가운데 서 있습니다.



17◈ 차(茶)

떨어지는 물방울이

종소리로 세상을 울린다는

수종사(水鐘寺)를 찾아

운길산 산마루에 올랐다



구름에 이마를 대고 있는

절의 찻집 삼정헌(三鼎軒)

주인과 함께 차 얘기 나누며

차를 우리는 시간도 맑다



향기로운 차로 목을 헹구며

내려다보는 두물머리 아리수

피안의 소식인 듯

은사의 비단결로 반짝인다



18◈ 가장 맛있는 밥상

산해진미로 가득한

교자상이라고요?



배가 꼬르르 시장할 때

마주한 밥상이고요?



그게 아니고요.

내 아내의 학설인데요.

‘남이 차려준 밥상’ 이래요.



그런 아내에게 평생 나는

맛없는 밥만 먹게 했으니…



19◈ 싶다가도

황혼이혼을 보면 용감하다 싶다가도

이제사 저 짐을 벗고 뭘 하려나 싶기도 하고

황혼재혼을 보면 대단하다 싶다가도

이제사 새 짐을 지고 어쩌려나 싶기도 하고



20◈ 시(詩)를

미당은 노래라 믿었고

대여는 말놀이라 여겼다

말장난에 말지랄들

시인들은 다 정신착란증 환자들



21◈ 두 가지 깨달음

모처럼 동네 이발소에 간다고

아내에게 신고하고 밖엘 나온다

'날씨가 꾸물하니 우산을 챙겨 가세요!'

아내의 충고를 무시하고 그냥 나온 내게

'비가 오면 전화하세요!'

아내가 다시 당부한다



아차! 마스크를 미처 못 챙기고 나왔다

길에 가는 사람들을 보자 생각이 났다

다시 집에 돌아가기는 귀찮고 해서

약방에 들러 마스크를 사서 끼고 이발소로 간다



이발을 하는 동안 창밖을 보니

행인들이 우산을 쓰고 지나간다

이발을 다 끝내고 나오려 하니 비가 억수로 쏟아진다

집에 연락을 하려고 주머니를 만져보니 휴대폰이 없다

어떻게 하지?

주변에 우산 파는 상점도 없는데…

전화기를 빌어 집에 연락을 해 본다? 그런데

아내의 전화번호가 깜깜하다

내 휴대폰에서 아내의 번호는 늘 1번이므로

아내의 진짜 전화번호는 내 뇌리에서 이미 사라졌다



장대비를 맞으며 빗속을 달리면서 깨닫는다

아내의 말을 잘 들으면 만사형통이라는 진리를!

비에 흠뻑 젖어 장닭처럼 허둥대며 비로소 깨닫는다

그 휴대폰이 바로 내 생명줄이라는 사실을!





22◈ 시인론(詩人論)

한 소년이

시인은 무엇하는 사람이냐고 묻기에

아름다운 노래 만들며 살아가는

제법 멋있는 사람이라고

일러 주었다.



한 청년이 또

시인은 무엇하는 사람이냐고 묻기에

과학자가 현미경이나 망원경으로도

볼 수 없는 그런 것까지 보고 가는

눈이 깊은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한 장년이

그런 질문을 또 하기에

가난하게 살지만

세상을 여유 있게 하는

다정하고 게으른 사람이라고 했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며 지나갔다.



한 노인이 멈춰 서서

소매를 붙들고 또 그렇게 물었다,

'정말 시인은 무엇하는 놈들이냐'고

‘죽음을 너무 일찍 깨우친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놈‘이라고

그의 막힌 귀에 대고 악을 썼다



23◈ 가을 편지

은사시나무들도

그들의 마지막 혈관을 뽑아

내일 떨쳐 버릴 여린 잎들을

저리도 곱게 치장하는구나



나도 이제껏

내 기억의 깊은 골방 속에

감추고 감추었던 푸른 추억들을

하나씩 끌어 올려

황금빛 치마를 입힐까 보다



이 땅이 서럽다고

바다 넘어 어느 먼 낯선 나라로

구름처럼 훌쩍 떠나간

눈이 큰 친구여

문득 밤을 새워 그대에게

긴 편지를 쓰노니



기러기야

하늘 뚫는 청둥기러기야

나도 가을이면

지상을 박차고 떠오른

한 마리 철새가 된다.



24◈ 달이 뜨기까지

뜸부기가 북을 치고 있었다

제 몸보다 큰 북을 어깨에 메고

느릅나무 언덕 위에 올라앉아

들판을 울리고 있었다

흐르는 북소리에 서천 하늘이

수박 속처럼 벌겋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청개구리가

호박넝쿨에 매달려 엉덩이를 들썩이고 있던

청개구리가 펄쩍 뛰어내리더니

두 손으로 입을 쥐어짜면서

나발을 불어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바위틈에서 귀를 쫑그리고 있던 귀뚜라미도

방울을 흔들며 뛰쳐나오고

명아주 잎새에 코를 박고 잠자던 여치도

눈을 비비고 일어나 해금을 뜯었다



왕벌들은 머루넝쿨 주위를 빙빙 돌면서

젓대를 불어대고

참새들도 지지배배 달려와서

가죽나무 가지에 올라앉아 혼성합창을 시작했다



달팽이가 뿔을 흔들면서 느릿느릿 걸어나와

불평을 했다

지휘를 해야겠는데 악보가 보이지 않는다고

그러자 누군가

동쪽 하늘 위에 둥근 등을 하나 밀어 올렸다

밝은 보름달이었다.





24◈ 청산무(靑山舞)

푸른 산 속 개울가 큰 너럭바위 위에

휘청거리며 움직이는 한 사람이 있네

짚신에 누더기 걸친 백발의 늙은이

한 손엔 청려장 또 한 손엔 호리병



불그레한 얼굴에 들썩이는 어깨

흔들리는 품새로 보아 춤을 추나 보네

앞으로 몇 걸음 다시 뒤로 몇 걸음

좌로 몇 발짝 또 우로 몇 발짝



넘어질 듯 일어서고 쓰러질 듯 살아나고

호리병에 매달렸다 지팡이에 의지했다

밀고 당기며 끊어질 둣 이어지는

느리게 뒤뚱대는 게으름뱅이 춤사위



청려장의 장무杖舞요 호리병의 병무瓶舞로세

근심 떨친 무애무요 불로장생 선무로다

개울물의 현금소리 딱따구리 비파소리

청설모도 들썩이고 청노루도 껑충이고



흰구름도 너울너울 청솔가지도 휘청휘청

얼씨구나, 온 청산이 신명난 춤판일세.



25◈ 오빠가 되고 싶다

나팔바지에 찢어진 학생모 눌러 쓰고

휘파람 불며 하릴없이 골목을 오르내리던

고등학교 2학년쯤의 오빠가 다시 되고 싶다



네거리 빵집에서 곰보빵을 앞에 놓고

끝도 없는 너의 수다를 들으며 들으며

푸른 눈썹 밑 반짝이는 눈동자에 빠지고 싶다



버스를 몇 대 보내고, 다시 기다리는 등교 길

마침내 달려오는 세라복의 하얀 칼라

'오빠!' 그 영롱한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다



토요일 오후 짐자전거의 뒤에 너를 태우고

들판을 거슬러 강둑길을 달리고 싶다, 달리다

융단보다 포근한 클로버 위에 함께 넘어지고 싶다



네가 떠나간

멀고 낯선 서울을 그리며 그리며

긴 편지를 지웠다 다시 쓰노라

밤을 새우던

열일곱의

싱그런 그 오빠가

다시 되고 싶다



26◈ 고무신

댓돌 위의 저 고무신

참 많이도 닳았네



밟으시던 시린 산천(山川)

그 바닥에 고여 있고



눈물짓던 푸른 달밤도

그 코 위에 출렁이네



꽃가지 타는 놀에 젖던 쇠방울

은하수 매운 강물 뚫던 소쩍꿍



님은 갔어도

맺힌 그 소리들 아직 남아

세상을 흔들고 있네.



27◈ 웃음보시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젊은 처자들 둘이

호들갑스럽게 웃습니다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들고 베어 물면서

한 마디 하고 깔깔대고

또 한 마디하고 자지러집니다

무슨 웃을 일이 그리도 많은지

호젓한 골목길이 그녀들의 웃음소리로

마냥 싱그럽습니다



영문도 모르면서

나도 빙긋이

따라 웃습니다



28◈ 세상의 중심 - 산상문답.10

[물음]

끝도 갓도 모를 망망한 세상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곳은

어디쯤 되는지요?



[대답]

네가 서 있는 곳이 바로 세상의 한가운데

세상은 너로 하여 열리고

세상은 너로 하여 닫힌다



네 머리 위의 뭇 성좌들은

너를 따라 돌고

네 발 밑의 이름 모를 들꽃들도

너를 바라 피어난다

네가 한 걸음 발을 내디디면

대지는 기우뚱거리고

네가 한 손을 들어 흔들면

구름 너울도 걷히는구나



보라 아침 햇살에 빛나는 만상의 물결을

너를 향해 손짓하며 도도히 흐르는 눈부신 축복들을

천지는 다 너의 것

너는 곧 이 세상의 주인

너는 세상의 한 중심이다.





29◈ 사람 냄새

만약 몸에서 악취가 난다면

썩은 시궁창 냄새를 풍긴다면

누가 그를 반가와 하겠는가?



혹 그가 만나자고 전화라도 하면

무슨 핑계를 대고 거절할 것이며

길을 가다 먼발치서 그를 보게 되면

몸을 숨겨 피해 갈 것이다



사람의 냄새도 가지가지다

돈의 냄새를 풍기는 사람

피의 냄새를 풍기는 사람

거만의 냄새도 있고

비겁의 냄새도 있다



그렇다고 역겨운 냄새만 있는 건 아니다

숭늉처럼 구수한 냄새도 있고

찌개처럼 알큰한 냄새도 있다

난초처럼 향기로운 냄새도 있고

매화처럼 청렬한 냄새도 없지 않다



그대에게서는 어떤 냄새가 나는지

궁금하신가?

그걸 아는 건 별로 어렵지 않다

시궁창에 들어갔다 나왔으면 시궁창 냄새

난초밭에 앉았다 나왔으면 난초꽃 냄새



그대의 냄새는

바로 그대가 만든다



30◈ 가시연꽃

가시연은 맷방석 같은 넓은 잎을 못 위에 띄우고

그 밑에 매달려 산다

잎이 집이며, 옷이며, 방패며 또한 문이다



저 연못 속의 운수행각, 유유자적의 떠돌이

그러나 허약한 놈이라고 그를 깔봐서는 안 된다

그를 잘못 건드렸다간

잎과 줄기에 감춰둔 사나운 가시에 찔려

한 보름쯤 앓게 되리라



그가 얼마나 매운 마음을 지니고 있는가는

꽃을 피울 때 보면 안다

자신의 육신인 두터운 잎을 스스로 찢어

창으로 뚫고 올라온 저 가시투성이의 꽃대,

그 끝에 매달린 눈 시린 보라색, 등대의 불빛

누구의 길을 밝히려

굳은 성문을 열고

저리도 아프게 내다보는가?



31◈ 늦은 까닭

우뚝 솟은 큰 산이

앞을 가로막기도 하고

깊이 흐르는 강물이

발을 멈추게도 하고

때로는 거센 소나기

가는 길을 묶기도 하고

굴러가는 수레가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질러가는 사람이

걸음을 더디게도 하고



때로는 작은 벌레들이

발길을 머뭇거리게도 하고

길가의 화사한 꽃에

눈이 팔리기도 하고



숲속의 영롱한 새소리에

귀가 잡히기도 하고

주막의 술 향기 못 떨쳐

하룻밤 묵어가기도 하고





32◈ 어느덧 12월이네

밥 몇 술 뜨다 보니

술 몇 잔 켜다 보니

잠 몇 밤 자다 보니

시 몇 수 읊다 보니



♤ 추천시


임보 시인의
사단시(​四短詩) 모음



늙음 / 임보

눈 어둠은 보기를 탐내지 말라는 뜻
귀 먹음은 듣기를 탐내지 말라는 뜻
이 빠짐은 먹기를 탐내지 말라는 뜻
잠 없음은 덧없이 꿈꾸지 말라는 뜻



씨 / 임보

껍질을 벗기면 다시 또 껍질
껍질을 벗기면 다시 또 껍질
양파의 씨가 어디 있느냐고?
네가 벗기는 그것이 바로 씨다



소문 / 임보

갱부 천남근千男根은
밤마다 들어간다
이마에 전지를 달고
바우 에미 이불 속으로




궁합宮合 / 임보

차가운 내 이마
따스한 그대의 손

* 조화로움은 동류同類의 것들의 결합에서가 아니라
이질적인 것들의 결합 곧 상호 보완에서 성취된다.
이지적인 남성에게는 감성적인 여성이 잘 어울린다.




염소 / 임보

섬에 배가 닿자
맨 먼저 달려와 반기는 이는
한평생 수평선만 이고 살던
수염이 긴 흑발의 노인




네 마리의 소 / 임보

고불古佛 이생진李生珍은 물소
포우抱牛 채희문蔡熙汶은 황소
난정蘭丁 홍해리洪海里는 들소
나 임보林步는 조그만 염소

* 우이동 사인방四人幇의 인물시다.
고불은 섬에 미처 늘 물을 떠나지 못한 것이 마치
물소와 같다. 포우는 이중섭의 그림 속에 나온
황소처럼 강렬해 보이지만 사실 양순하고,
난정은 난과 매화를 즐기는 선비지만 들소와 같은
정력이 없지 않다. 나 임보는 굳이 소라고 친다면
보잘것없는 염소라고나 할까.
이분들의 아호는 내가 붙인 것이다.




노치老癡 / 임보

썩은 뼈다귀 한점 놓고 아귀다툼인
대머리 독수리놈들에게 혀를 찼더니
오늘의 내 몰골이 이에서 멀지 않구나
청맹과니로다, 부끄러운 이 지명知命이여

* 나이가 들면 욕심의 굴레로부터 좀 자유로워져야
할 텐데 그렇지가 못하다.
하찮은 것들에도 미련을 못 버리고 매달려 있으니
이 무슨 눈먼 몰골이란 말인가. 과연 병이로다.







닭 / 임보

닭들에겐 모이를 주는 손이 있어
굶주릴 염려는 없다
그러나 그 때문에 날개를 잃고
드디어는 그 손에 목이 비틀린다




* 백화난만百花爛漫의 봄은 붉은 빛
녹음방초綠陰芳草의 여름은 초록 빛
만산황엽滿山黃葉의 가을은 노란 빛
설원만리雪原萬里의 겨울은 흰 빛

- 임보 시집 <운주천불>




동자승童子僧 / 임보

참, 환하기도 해라
연꽃보다 고운 웃음
평생의 염불로도 못 닿을
저 해맑은 천진天眞

* 이제 막 피어나는 어린 생명들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다.
그 가운데서도 어린아이의 고움은 신묘하기 까지 하다.
누가 저 해맑은 어린 몸에 벌써 가사袈 裟를 입혔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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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머리에

산문과는 달리 시의 시다운 특징의 하나는 그 짧음이다.
가능한 한 줄여서 압축 간결하게 표현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漢詩의 絶句나 일본의 하이구俳句 그리고 우리의 평시조
같은 것들은 간결을 지향하는 대표적인 정형시들이다.
나는 우리의 현대시 가운데 10행 미만의 짧은 시들을
살펴본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단시들 가운데는 4행시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4행 이하의 시들도 그 의미 구조가 네 단계로 나뉘어
전개되고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시의 이 네 마디 구조는 멀리는 黃鳥歌, 公無渡河歌,
龜旨歌 등 우리의 고대시가와 사구체 鄕歌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절구 역시 기승전결의 네 마디 구조로 이루어진 대표적인
장르다. 시에서 네 마디가 이렇게 선호된 것은 수만 년
동안 四季를 배경으로 살아온 우리의 삶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이 네 마디는 우리의 성정에 잘 맞는 시형식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네 마디의 짧은 노래를
수년 전부터 시도해 오고 있다.
이상적인 짧은 길이는 한 마디가 2음보 내외 그러니까
작품 전체가 8음보 내외로 이루어진 간결한 형식이다.
나는 이 형식을 준정형시의 새로운 한 장르로 설정하고
四短詩로 명명한 바 있다.
이 사단시는 시인이 아닌 일반 사람들도 큰 부담없이
함께 짓고 즐길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장차 국민문학의 한 장르로까지 발전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이 작품집은 전 6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엄격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사물시, 서정시, 관조시, 설화시,
기행시 등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비교적 다양한 종류의 詩風들을 시험해 보고자 시도한
것이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작품의 끝에 짧은 해설을
달았다. 이런 글이 불필요한 분들에게는 그야말로
蛇足이 될지도 모르겠다.
굳이 읽지 않아도 무방하다.

2000년 2월 22일
운수재韻壽齋에서 林 步






종(鐘) / 임보

산길을 가다 도우(道友)라는 여인을 만났다
방장사(方丈舍)라는 절에서 십여 년 수행을 하다
싱거워 그만 떠나는 길이라고 한다
보아하니 땡추다
심심하던 터라 이야기 이야기하며
함께 길을 간다
새를 만나면 새 얘기
나무를 만나면 나무 얘기
바람과 구름
달과 별들의 얘기도
이제는 다 동이 났다
개울에 이르러 물을 마시려는데
어디선가
작은 은종(銀鐘)의 울림이 코를 간지린다
소리 나는 곳을 두리번거렸더니
도우(道友) 웃으며
그녀의 배꼽 밑을 살며시 열어
물 속에 드리워 보인다
두 다리 사이에 매달린 예쁜 은백의 종이
물 그림자 속에서 울고 있다
두 손으로 와락 물을 움켜쥐었더니
도우(道友) 힘없이 물 위에 주저앉는다
그러자
개울에 잠겼던 산도 구름도 다
산산 조각이 나고
내 피는 종의 소리로
가득 끓었다
옷이 마르기를 기다려 다시 길에 서는데
도우(道友)는 오던 길을 되짚어 방장사로 향하고
나는 해를 따라 서쪽으로 걷는다
이제 보니
도우는 땡추가 아니라 보살이다.

ㅡ임보 시집 <구름 위의 다락마을>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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