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모음

폭설 / 오탁번

뉴우맨 2022. 1. 19. 06:19

https://m.blog.daum.net/kingkong8259/4851

폭설(暴雪)(오탁번)

삼동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 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 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의 미아가 된 듯 울부짖었다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감상 : 오탁번 시인.

1943년 7월 충북 제천시 백운면에서 태어났습니다.

고려대학교 영문과 및 동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하였으며

수도여자사범대학(현재의 세종대학교)을 거쳐

1978년부터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지난 2008년 8월 정년퇴임, 지금은 명예교수입니다.

1966년 고대신문사 학생기자로 활동하던 스물 네 살 때 동아일보에

‘철이와 아버지’라는 제목의 동화가, 그리고 1967년 이듬해에는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순은이 빛 나는 이 아침’이라는 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습니다.

1987년 한국문학 작가상, 1994년 동서문학상, 1997년 정지용 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하였습니다.

시집으로는 , (1985), (1991),

(1994), (1999), , , (문학수첩, 2014) 등이 있고,

소설 (1974), 산문집 (1998) 등이 있습니다.



오탁번 시인은 해학과 풍자의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세간에 떠도는 익살과 만담을 시의 소재로 끌어들여 질펀하게 녹여내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시인이라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오탁번 시인은 우아하고 고상한 언어를 찾아서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각 지방의 친숙한 사투리와 계층에 맞는 세속적인 언어를 찾아

대중들의 삶을 이해하고 대변하면서 독자들과 자연스런 공감을 이끌어내는데 탁월합니다.

수많은 애환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시인은 웃음과 해학으로 표현해 내면서 민중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고

입가에 미소가 맴돌게 하는 청량제 역할을 하는 시인이라고 표현하면 적합할 것


(((♡❤

? 애주가

?소 주

소주병이 이세상의 사람들을 현혹하네
남성들의 희망이요 살아가는 긍지로다
골수백번 마셔대니 위장간장 펑크나고
골이가도 우찌할꼬 너무좋다 우리소주

대왕중의 대왕소주 자식들도 많고많네
성질날때 어케할꼬 병째불자 나발소주
귀찮을때 그냥먹고 막시키자 막소주라
술못먹는 사람들은 약하단다 오이소주

여친들도 꼴각꼴각 잘마신다 레몬소주
고상한척 다리꼬고 기분낸다 체리소주
소주먹는 사람들아 내말한번 들어보소
수입불가 신토불이 우리소주 사랑하세

? 맥 주

바다건너 저물건너 코큰이들 먹던맥주
이맛이야 제맛이야 그놈한번 시원하네
부담없다 맥주먹고 기분좋다 맥주먹네
배고플때 배채우고 더위싫어 맥주최고

연인이랑 오손도손 동기들과 왁자지껄
여기원샷 저기원샷 바쁘구나 화장실아
화이트다 생맥주다 너는카스 나는오비
입맛들도 주책이지 구구각각 까다롭다

짝지같이 맥주먹고 입술에다 키스해봐
향기로운 트림내음 여친얼굴 웃음꽃펴
신나놀다 집와서는 와이프에 따귀맞네
취하도록 마신다음 깨고나서 다시먹자

맥주먹고 취한사람 소주보다 흉하드네

? 양 주

돈있을때 양주먹지 가난하면 우찌마셔
기분이다 뻐기다가 양주먹고 이쑤시네
술모르는 놈팽이들 으시대며 양주마셔
까불까불 쪽쪽터니 전안면에 불이났네

요건워커 요건조커 이름하난 잘외우고
기분째진 사장님은 김마담뚜 싸롱이라
이눔저눔 다모여서 여친끼고 헤롱헤롱
잘나간다 룸싸롱에 사장님들 어성와용

개나소나 사장이고 건달들은 회장이고
양주처럼 좋은술이 있는자의 전용이라
잘먹으면 약이되고 못먹으면 븅신된다
우리양주 마셔봐요 외세양주 막아내고

우리양주 개발하여 양주시장 개척하세

? 막걸리

우리서민 애환담긴 막걸리를 마셔보세
돈없는자 가난한자 한잔이면 그만이지
일할때도 막걸리고 밥먹을때 막걸리라
우리곡식 곱게담아 다둑다둑 막걸리고

힘든농사 결실맺힌 쌀로빚은 곡주니라
연인이랑 막걸리로 걸죽한정 이어보세
친구들과 한잔두잔 따스한정 막걸리라
영양많고 맛도좋은 울막걸리 마시자요

스테미나 정력부족 막걸리로 해결하고
이어가는 손끝마다 막걸리향 정이돌고
쌀막걸리 사랑하고 가짜들은 멀리하세
진짜곡주 약이되고 화학주는 병이된다

신토불이 우리농주 막걸리를 사랑하세

? 폭탄주

너와나의 기분이다 폭탄주로 해결하네
맥주에다 소주타서 양주먹고 폭탄주라
그래먹고 취한사람 제정신이 아니구나
폭탄맞은 머리하고 삼일동안 고생하지

돈없으면 어떡하나 폭탄주가 최고라네
나는술세 폭탄주니 널리널리 퍼졌고나
먹는사람 잘도먹고 못먹는눔 맛이간다
엠티가서 폭탄맞고 군대가서 폭탄이니

먹을때는 먹더라도 뒷감당은 자기책임
민주국가 민주정부 술먹는거 자기마음
술먹는거 따지자니 못먹는자 할말없네
자기재량 먹은술은 정신건강 사람건강

개와같이 마신술은 패가망신 못면한다


?주찬 (酒讚)

“酒” 字를 보라!
물수변에
닭유 아니던가?

술은, 닭이 물을 먹듯 조금씩
조금씩 천천히 마셔야 하느니...
원샷하시면 몸에 해로운 것이니라~~

斗酒不辭
(두주불사)는
敗家亡身
(패가망신) 한다고 소인배들은 말하지만,
이는 술을 모르고 하시는 말씀!

1.한 잔 술을 마시면 근심걱정 사라지고 .

2.두 잔 술을 마시면 得道(득도)를 한다네.

3.석 잔 술을 마시면 神仙(신선)이 되고...

4.넉 잔 술을 마시면 鶴(학)이 되어 하늘을 날며...

5.다섯 잔 술을 마시면
염라대왕도 두렵지
않으니...

이렇게 좋은것이
어디있느냐?

부모님께 올리는 술은
孝道酒(효도주)요,

자식에게 주는 술은
訓育酒
(훈육주)이며,

스승과 제자가 주고받는 술은
敬愛酒(경애주)요,

은혜를 입은 분과
함께 나누는 술은
報恩酒
(보은주)라...

친구에게 권하는 술은 友情酒
(우정주)이고...

원수와 마시는 술은
和解酒
(화해주)이며...

동료와 높이 드는 술은
(건배주)라...

죽은 자에게 따르는 술은 哀悼酒
(애도주)요...

사랑하는 사람과 부딪치는 술은
合歡酒
(합환주)라...

여봐라 풍악을 울리고 권주가를
부르도록 하여라

즐거운 마음이 최고의 행복이니^^*

언제나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보내세요~^^

?《망 중 한》?

내 어찌 이 한잔
술을 마다하리오ㅡ

하늘이 술을 내리니
천주(天酒)요

땅이 술을 권하니
지주(地酒)라

내가 술을 좋아하고
술 또한 나를 졸졸 따르니
내 어찌 이 한잔 술을 마다하리오

그러하니 오늘밤
이 한 잔 술은
지천명주 (地天命酒)로
알고 마시노라

물같이 생긴 것이
물도 아닌 것이
나를 울리고 웃게 하는 요물이로구나

한숨 베인 한 잔 술이 목줄기를 적실때
내안에 요동치는
슬픔 토해 내고
이슬 맺힌 두 잔 술로
심장을 뜨겁게 하니
가슴속에 작은 연못을 이루어놓네

석잔술을 가슴 깊이 부어그리움의 연못에 사랑하는 그대를
가두어 놓으리라

내가 술을 싫다하니
술이 나를 붙잡고
술이 나를 싫다하니
내가 술을 붙잡는구나

●●○●●

꽃은 피어도 소리가 없고
새는 울어도 눈물이 없고
사랑은 불타도 연기가 없더라....
 
장미가 좋아 꺾었더니
가시가 있고
친구가 좋아 사귀었더니
이별이 있고
세상이 좋아 태어났더니
죽음이 있더라.......


? 술과 사랑, 그리고 친구

손이 설레는 것은 술이요, 가슴이 설레는 것은 사랑이다.

먼저 권하는 것은 술이요, 조심해 권하는 것은 사랑이다.

버리는 것은 술이요, 간직을 하는 것은 사랑이다.

몸으로 마시는 것은 술이요, 가슴으로 마시는 것은 사랑이다.

아무에게나 줄 수 있는 것은 술이요, 한 사람에게만 줄 수 있는 것은 사랑이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술이요, 뜻대로 안되는 것은 사랑이다.

비울 수 있는 것은 술이요, 채울 수 있는 것은 사랑이다.

머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술이요,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사랑이다.

★술과 사랑을 다 나누고 공유할 수 있는 그 이름은 친구입니다.


? 인생은 주객(酒客) 인거여!

친구여!
세상은 주막(酒幕)인거여.
구천(九泉)을 돌던 영혼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는 것은 주막에 온 거여 단술 쓴술로 취하러 온 거여

주막 올때 저 마실잔 들고오는 사람 없고 갈때도 저 마신잔 들고 가는 사람 없어!

그와 같이 너 또한 빈 손쥐고 주막으로 취하러 온 거여.

잔 안들고 왔다고,
술 안파는 주막 없고.
잔 없어서 술 못마실 주막도 없지만 네가 쓰는 그 잔은 네 것이 아닌거여 갈 때는 주막에 놓고 가야 되는 거여.

단술 먹고 웃는 소리.
쓴술 먹다 우는 소리.
시끌벅적했던 세상 그곳은 주막이고 술 깨면 떠나가는 너는 나그네 인거여.

훗날오는 손님에게 네 잔을 내어주고 때가 되면 홀연히
빈손으로 가야 하는 너는 酒客 인거여.

인생을
지혜롭게 사는 사람들중에서


(선물)소주한잔~

인생이란 어차피
홀로 걸어가는
쓸쓸한 길이라지만

내가 걷는 삶의 길목에서
그래도 평생을 함께
걷고 싶은 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

사랑하는 이를
만나기 보다는
연인도 아닌
친구도 아닌
그저 편안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

고단하고 힘든 날에
마음으로 다가가면
살포시 내등을
토닥여 주는
다정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

부족한 내가
위로해 주기보다는
그의 위로를
더 많이 받아
가끔은 나보다
더 나를 아껴주는
마음이 넓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기도로서도
채워지지 않는
허약한 부분을
어느 한 사람의
애틋한 마음을 만나서
기쁜 날보다는 슬픈 날에
불현듯 마음이 찾아가면
보듬어주는 따뜻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


? 지나친 음주는 삼갑시다. 재미로 읽
어 주세요 좀 거슬리는 표현 있어도
양해 바랍니다. 작자 미상. 부분적으
로 일부 초동이 수정했습니다.
제목 당초 '알콜학 개론'

? 반갑습니다.
귀한 걸음에
감사드려요.
예쁜 모습은
눈에 남고
멋진 말은
귀에 남지만
따뜻한
베품은
가슴에
남는다.
소중한 벗님이
머무는
곳에
언제나
즐겁고
건강하며
행복한
나날되세요.^♡^

.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jaeok9876&logNo=222330082321&proxyReferer=https:%2F%2Fm.search.daum.net%2Fsearch%3Fw%3Dtot%26q%3D%25EC%2598%25A4%25ED%2583%2581%25EB%25B2%2588%2520%25EC%258B%259C%25EB%25AA%25A8%25EC%259D%258C%26DA%3DNTB

굿 모닝/오탁번


아침 일찍 일어나면
화장실로 먼저 간다
강추위에 안녕한지
살피러 간다
물을 내리니, 쏴!
굿 모닝? 하니
굿 모닝! 하네


늙은 아내 잠자는
안방을 살짝 열어본다
문 여는 소리에
홱 돌아눕는다
꿈나라 잠보!
굿 모닝? 해도
굿 모닝! 안 하네





연애/오탁번


자가운전하는 예쁜 여자가
내가 달리는 차선으로
얌체같이 끼어들기하고는
차창 밖으로 흔드는 하얀 손을 보면
무 베어먹듯 그냥 한 입 물고 싶다
눈 마주치면 눈흘레나 하고 싶다
뒤에서 들이받을 생각 아예 말고
살가운 접촉사고나 내고 싶다
ㅡ지금쯤 고향의 억새밭 물녘에서는
무지개도 뛰어넘을 만한 힘센 황소가
녈비에 황금빛 털이 간지럽겠디


밤길에 잽싸게 끼어들기하고는
점멸등 깜박이며 달아나는 차를 보면
반딧불이가 반딧반딧 짝을 찾는 것 같다
나도 한 마리 반딧불이가 되어
하늬바람에 공중제비하고 싶다
홰친홰친하는 낚싯대 펴고
동동거리는 형광찌 불빛따라
얄미운 붕어 한 마리 잡고 싶다
ㅡ지금쯤 고향 집 지붕에는
하양 박꽃이 환하게 피어
은하수까지 다 물들이겠다





우리 시대의 시창작론/오탁번


시를 시답게 쓸 것 없다

시는 시답잖게 써야 한다

껄껄껄 웃으면서 악수하고

이데올로기다 모더니즘이다 하며

적당히 분바르고 개칠도 하고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똥끝타게 쏘다니면 된다

똥냄새도 안 나는

걸레냄새 나는 방귀나 뀌면서

그냥저냥 살아가면 된다

된장에 풋고추 찍어 보리밥 먹고

뻥뻥 뀌어대는 우리네 방귀야말로

얼마나 똥냄새가 기분 좋게 났던가

이 따위 처억에 젖어서도 안 된다

저녁연기 피어오르는 옛마을이나

개불알꽃에 대한 명상도

아예 엄두 내지 말아야 한다


시를 시답게 쓸 것 없다

시는 시답잖게 써야 한다

걸레처럼 살면서

깃발 같은 시를 쓰는 척하면 된다

걸레도 양잿물에 된통 빨아서

풀먹여 다림질하면 깃발이 된다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 된다


-벙그는 난초꽃의 고요 앞에서

『우리 시대의 시창작론』을 쓰고 있을 때

내 마빡에서 별안간

'네 이놈!'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만 연필이 뚝 부러졌다





폭설/오탁번



삼동(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天地)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宇宙)의 미아(迷兒)가 된 듯 울부짖었다

―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토요일 오후/오탁번

토요일 오후 학교에서 돌아온 딸과 함께
베란다의 행운목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일 세상사람 저마다 눈을 뜨고
아주 바쁘고 부산스럽게 몸치장 예쁘게 하네
하루일 하루공부 다 끝내고 중고생 관람가
못된 장면은 가위질한 그저 알맞게 재미난 영화
팝콘이나 먹으며 구경하러 가는 것일까
한주일의 일과 추억을 파라솔 접듯 조그맣게 접어서
가볍게 들고 한강 시민공원으로 나가는 것일까
매일 물을 뿌려 주어야 싱싱한 잎을 자랑하는
베란다의 행운목이 펼쳐 주는 손바닥만큼씩한 행복
토요일 오후의 우리집은 온통 행복뿐이네
세 살 난 여름에 나와 함께 목욕하면서 딸은
이게 구슬이나? 내 불알을 만지작거리며 물장난하고
아니 구슬이 아니고 불알이다 나는 세상을 똑바로
가르쳤는데 구멍 가게에 가서 진짜 구슬을 보고는
아빠 이게 불알이나?하고 물었을 때
세상은 모두 바쁘게 돌아가고 슬픈 일도 많았지만
나와 딸아이 앞에는 언제난 무진장의 토요일 오후
모두다 예쁘게 몸치장을 하면서 춤추고 있었네
구슬이나? 불알이나? 딸의 어릴 적 질문법에 대하여
아빠가 시를 하나 써야겠다니까 여중 2학년은
아니 아니 아빠 저를 망신시킬 작정이세요?
문법도 경어법도 딱 맞게 말하는 토요일 오후
모의고사를 열 문제나 틀리고도 행복하기만한
강남구에서 제일 예쁜 내 딸아
아이고 예쁜 것!





굴비 / 오탁번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장수가 지나갔다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둘러보았다

―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려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안 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박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 불렀다





鳴沙山 / 오탁번



명사산 아득한 모래바람 속에서

긴 잠을 주무시는

혜초 스님을 月牙泉으로 모셔다가

서울에서 가져온

마늘종 고추장 깻잎 안주 삼아서

곡차 몇 잔 마신다



스님의 잠동무 아주 잘해 온

사막의 계집들도 불러내어

꼭두서니빛 꽃을 피우는

낙타초 가에 앉혀두고

스님한테 옛 社稷의 흥망을 아뢴다



즈믄 해 동안 잠동무하면서

스님한테 살가운 간지럼 많이나 태운

양젖 냄새 나는 위구르 계집과

말젖 냄새 나는 흉노 계집이

정말 갸륵해

월아천 옥빛 물로 옥가락지 만들어

모래울음 보채는 손가락 손가락에

하나씩 끼워준다





밥냄새 1 / 오탁번



하루걸러 어머니는 나를 업고

이웃 진외가 집으로 갔다

지나다가 그냥 들른 것처럼

어머니는 금세 도로 나오려고 했다

대문을 들어설 때부터 풍겨오는

맛있는 밥냄새를 맡고

내가 어머니의 등에서 울며 보채면

장지문을 열고 진외당숙모가 말했다

-언놈이 밥 먹이고 가요

그제야 나는 울음을 뚝 그쳤다

밥소라에서 퍼주는 따끈따끈한 밥을

내가 하동지동 먹는 걸 보고

진외당숙모가 나에게 말했다

-밥 때 되면 만날 온나



아, 나는 이날 이때까지

이렇게 고운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태어나서 젖을 못 먹고

밥조차 굶주리는 나의 유년은

진외가 집에서 풍겨오는 밥냄새를 맡으며

겨우 숨을 이어갔다





厄막이鳶 / 오탁번



내내 썰매 타고 눈싸움만 하느라

색동 설빔은 그만 얼룩이 다 졌지만

정월 대보름 아침이 밝아오면

부럼을 깨물고 더위도 팔고

고드름 따먹으며 고샅길을 내달린다

저녁이 되어 보름달이 둥실 떠올라

온 동네는 白夜처럼 환해지고

돌담가 달집에 불을 놓으면

달집에 쌓인 생솔가지가 불타며

냄비 속 쥐이빨 옥수수 튀는 소리를 낸다



달빛이 눈처럼 희디희어

올 여름 장마 걱정하면서

방패연에 이름과 생일 또박또박 적는다

허릿대 대오리도 팽팽한 방패연에

하늘길 노자할 동전 한 닢과

누에고치를 매달아 불을 붙이고

얼레의 연줄 죄다 풀어서

厄막이 厄막이 외치며 연을 날린다



厄막이鳶은

제 목숨 다 하는 줄도 모르고

창과 방패 쥐고 출전하는 무사처럼

달빛 넘치는 하늘로 높이 날아오른다

불에 타는 고치가 마지막 잉걸처럼

공중에서 아스라이 깜박일 때

연줄이 툭 끊어지며

방패연은 되똥되똥 내 厄運을 싣고

까마득한 하늘길로 떠나버린다



厄막이鳶 하늘 높이 날아갔으니

구구단 받아쓰기 죄다 백점 맞고

키도 쑥쑥 자라서

올해는 보리고개 잘 넘어가면 좋겠다

불장난 많이 한 대보름 밤

잠이 들면

잣눈이 내린 고샅길을 지나

키 쓰고 소금 얻으러 가는 꿈을 꾼다





블랙홀 / 오탁번



같은 동네에 사는 이종택과 함께

白雲池 아래 放鶴里에 사는

초등학교 동창 김종명이네 집에 놀러갔다

멍석에 널린 고추가 뙤약볕 같이 따갑고

함석지붕에는 하양 박이 탐스러웠다

누렁이 한 마리가 마당에서

제 똥냄새 맡다가 꼬리를 쳤다

찰칵! 한 장 찍고 싶은

우리 농촌의 옛 풍경 속으로

재작년 추석 무렵에 무심코 쑥 들어갔다



안방에서 머리가 하얀 안노인네가 나왔다

어릴 때 친구 집에 놀러 가면

나는 어른들께 답작답작 큰절을 잘 했다

그러면 친구 어머니가 씨감자도 쩌주고

보리쌀 안쳐 더운밥도 해주곤 했다

-종명이 어머니가 여태 살아계시는구나!

나는 얼른 큰절을 하려고 했다



그 순간 몇 만 분의 1초의 시간이 딱 멈추었다

종명이가 제 어머니에게 말하는 소리가

우주에서 날아오는 초음파처럼

아득하게 들려왔다

-임자! 술상 좀 봐!

초등학교 동창 마누라에게 큰절할 뻔한 나는

블랙홀에 빠진 채 허우적거렸다



머리가 하얀 초등학생 셋은

무중력 우주선을 타고

저녁놀 질 때까지 술을 마셨다

-放鶴里에 왔으니 鶴 한 마리 잡아다가

안주로 구워먹자, 씨벌!

종택이와 종명이는 내 말에 장단을 맞췄다

-그럼 그렇고 말고지, 네미랄!

光速보다 빠르게 블랙홀을 가로지르는

鶴을 쫓아가다가

그만 나는 정신을 잃고

종택이 경운기에 실려 돌아왔다





감자밭 / 오탁번



흙냄새 향기로운 감자밭 이랑에

하양 비닐을 씌우는

농부 내외의 주름진 이마에는

따사로운 봄볕이 오종종하다

서방은 비닐을 앞에서 끌고

아낙은 뒤에서 그걸 잡고 있는데

비닐 끝을 흙으로 덮기도 전에

자꾸 앞으로 나가니까

소를 몰 때 하듯이 아낙이 말한다

-워! 워!

그 말을 듣고

서방이 씩 웃으며 한마디 한다

-워,라니?

흙을 다 덮은 아낙이 또 말한다

-이랴! 이랴!



신방에 들어가는 새댁처럼

가지런한 감자밭 아랑은

물이랑 되어 찰랑이는 비닐을

비단 홑이불처럼 덮고

제 몸을 어루만져주기를 기다린다

농부 내외는

바소쿠리에 가득한 씨감자눈을

비닐을 뚫고 하나하나 꾹꾹 심는다

멧돼지와 고라니들이 내려와

감자를 반나마 나눠 먹을 테지만

주먹만한 감자알을 떠올리며

새흙을 덮어 다독여준다

감자밭 이랑은

아기를 잉태한 새댁처럼

다소곳이 엎드린 채

감자알이 여무는

하짓날 긴긴 해를 꿈꾸고 있다





작별 / 오탁번

오늘 아침 그대들과 작별하고 싶다
꿈꾸며 바라본 설핏한 저녁 노을
진토닉에 몸을 푸는 빨간 체리
서해바다 노을 한강까지 밀어올리며
얼음 밑에서 겨울을 나는 누치 한 마리
그대들과 선선히 작별하고 싶다
미끈미끈한 비늘도 모두 흩어지고
목마른 입술 닿은 종이컵도
재활용 봉투 속에서 잠들고 있다
첨탑에서 종소리 아득해질 때마다
내 눈썹 시리게 한
생애의 벼랑도
뜨거운 알코올 목구멍에 쏟아
나의 욕망 연소시킬 불씨도
이젠 그만 사그라지면 좋겠다
아무리 불러봐야 메아리도 없는 아침
떠나간 빈 자리 메워줄 슬픔 하나로
텅 빈 자리에 호젓이 남고 싶다
면도한 두 볼에 스킨로션 바르고
구겨진 넥타이로 목을 감고
죽어가는 관절 일으켜 세워
그대들과 절뚝거리며 작별하고 싶다


여기쯤에서 / 오탁번

여기쯤에서 그만 작별을 하자
눈뜨고 사는 이에게는
생애의 벼랑은 언제나 있는 법
거기 피어 있는 이름 모를 풀꽃
하나 따서 가슴에 달고
뜻 없는 목숨 하나 따서
만났던 그 자리 그 어둠 앞에
우리의 죄로 젖어 있는 추억을 심고
그만 여기쯤에서 작별을 하자
똑같은 항아리가 어느 한쪽에
깨어져서 들어가야 한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도 아니다
우리의 입술은 아침저녁 비가 오고
내 몸에 묻어 있는 눈썹 하나
머리칼 한 올이 나의 새벽까지
따라와서 죄를 짓자고 속삭인다 해도
너의 찬 손이 뜨거워지고
나의 안경이 흐려진다해도
말 하지마, 아무 말도 하지 마
작별을 하자 그만 여기쯤에서 생애의
벼랑에서 뛰어내려 젖은 입술을
입술에 부비며 말하지마, 아무 말도 하지 마


汽車 / 오탁번

할머니가 부산하게 비설거지하고
외양간 하릅송아지도 젖을 보챌 때면
저녁연기가 아이들 복숭아뼈 적시며
섬돌 아래 고샅길로 낮게 퍼졌다
숙제 끝내고 토끼풀도 다 뜯어다주고
심심해서 사물사물해졌을 때
산 너머 기차 소리가 들려오면
몽당연필에 마분지 공책 들고
아이들은 앞산 등성이로 달려갔다
까치발 암만해도 기차는 보이지 않고
두엄더미 지렁이울음처럼
기차소리만 치치포포 하릿하게 들렸다
기차를 한번도 본 적이 없지만
귀를 모으고 기차소리 들으며
재바르게 기차 그림을 그렸다
여물통 같은 기차, 달구지 같은 기차!
개다리소반 같은 기차, 바소쿠리 같은 기차!
아이들은 기차소리를 그리며
멀고먼 나라로 가는 기차표를 끊었다
손에 쥔 기차표 하뭇해하며
아득한 미리내 여울 건너듯
저녁연기 밟으며 돌아올 때면
깜깜해진 비구름이 빗방을 흩뿌리며
쏭당쏭당 개찰하듯 기차표를 적셨다


감자밭 / 오탁번

흙냄새 향기로운 감자밭 이랑에
하양 비닐을 씌우는
농부 내외의 주름진 이마에는
따사로운 봄볕이 오종종하다
서방은 비닐을 앞에서 끌고
아낙은 뒤에서 그걸 잡고 있는데
비닐 끝을 흙으로 덮기도 전에
자꾸 앞으로 나가니까
소를 몰 때 하듯이 아낙이 말한다
-워워!
그 말을 듣고
서방이 씩 웃으며 한마디 한다
-워, 라니?
흙을 다 덮은 아낙이 말한다
-이랴! 이랴!

신방에 들어가는 새댁처럼
가지런한 감자밭 이랑은
물이랑 되어 찰랑이는 비닐을
비단 홑이불처럼 덮고
제 몸을 어루만져주기를 기다린다
농부 내외는
바소쿠리에 가득한 씨감자눈을
비닐을 뚫고 하나하나 꾹꾹 심는다
멧돼지와 고라니들이 내려와
감자를 반나마 나눠먹을 테지만
주먹만한 감자알을 떠올리며
새흙을 덮어 다독여준다
감자밭 이랑은
아기를 잉태한 새댁처럼
다소곳이 엎드린 채
감자알이 여무는
하짓날 긴긴 해를 꿈꾸고 있다




사랑의 깊이 / 오탁번


너를 떠나보내고 돌아오는 길에도
어둠의 깊이만큼 비애가 끝간 데 없었다.
만나면 만날수록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고
어쩔 수 없이 젖어드는 그리움의 얼굴

바람이 불고 눈이 오고 또 꽃이 피고
천둥 번개 요란한 새벽마다 눈을 뜨고
너의 옷을 하나씩 벗겼다 알몸에 알몸을
가까이하고 여름 여치가 날개를 비벼대며 울 듯

너를 떠나보내고 돌아오는 길에는
사랑의 깊이만큼 우수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별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더욱 빛나는
너의 흰 손 흰 이마 가슴 적시는 눈물 방울





겨울강 / 오탁번

겨울강 얼음 풀리며 토해내는 울음 가까이
잊혀진 기억 떠오르듯 갈대잎 바람에 쓸리고
얼음 밑에 허리 숨긴 하양 나룻배 한 척이
꿈꾸는 겨울 홍천강 노을빛 아래 호젓하네
쥐불 연기 마주 보며 강촌에서 한참 달려와
겨울과 봄 사이 꿈길 마냥 자욱져 있는
얼음짱 깨지는 소리 들으며 강을 건너면
겨울나무 지피는 눈망울이 눈에 밟히네
갈대잎 흔드는 얼음속에 가는 눈썹 숨기고 잠든
아련한 추억이 버들개지 따라 실눈을 뜨네
슬픔은 슬픔끼리 풀려 반짝이는 여울 이루고
기쁨은 기쁨끼리 만나 출렁이는 물결이 되어
이제야 닷 올리며 추운 몸뚱아리 꿈뜰대는
겨울강 해빙의 울음소리가 강마을을 흔드네


백두산 천지 / 오탁번

솟구쳐 오른 백두산 멧부리들이 온뉘 동안 감싸안은
드넓은 천치가 눈앞에 나타나는 눈깜박할 사이
그 자리에서 나는 그냥 숨이 막힌다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백두산 그리메가
하늘보다 더 푸른 천지에 넉넉한 깃을 드리우고
메�은 우레소리 지나간 여름 한나절
아득한 옛 하늘이 내려와 머문 천지 앞에서
내 작은 몸뚱이는 한꺼번에 자취도 없다.
내 어린 볼기에 푸른 손자국 남겨 첫 울음 울게 한
어머니의 어머니 쑥냄새 마늘냄새 삼베적삼
서늘한 손길로 손님이 든 내 뜨거운 이마 짚어두던
할머니의 할머니가 백두산 천지 앞에 무릎 꿇은 나를
하늘눈 뜨고 바라본다 백두산 멧부리가 누리의
첫 새벽 할아버지의 흰 나룻처럼 어렵고 두렵다.


배추흰나비 / 오탁번

호수보다 더 잔잔한 기다림으로
저녁 노을 지는 그리운 하늘아래
배추흰나비처럼 날아다녔다.
저녁 새 깃드는 먼 숲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나무 아래 이끼를 기르듯
그렇게 수많은 아픔으로
갑자기 구름이 몰려오고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얼굴
보고싶은 눈썹 날리는 머리칼
양 한마리가 초원으로 멀리 숨듯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흐려지는 눈앞에 밟히는
눈 코 입 귀 머리칼
나무숲보다 더 그윽한 그리움으로
이슬방울조차 무서운 배추흰나비처럼
지금 나는 날아오르고 싶다.



'확 깨는' 오탁번 시, 이렇게 만들어졌다[맑은 바람 밝은 달, 그곳에 산다②] '해피 버스데이'의 시인 오탁번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복잡한 서울을 벗어나 지방에서 생태공동체를 꾸리거나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맑은 바람 밝은 달, 청풍명월(淸風明月)의 고장 충청북도에는 유독 사연 많고 소신 있는 예술인과 공동체운동가들이 많이 모여들고 있다. <단비뉴스>는 이렇게 충북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문화인과 활동가들을 찾아 나섰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졸업생인 CJB청주방송 황상호 기자가 글을 쓰고 서양화가 유순상씨가 사진기와 붓을 들었다. - 기자 주



▲  충북 제천시 백운면 애련리 원서문학관. 오탁번 시인은 폐교된 초등학교 운동장에 텃밭을 일구었다.

한양으로 과거 시험을 보러간 박달도령과 그를 기다리다 상사병에 걸려 숨진 금봉낭자의 전설이 깃든 충북 제천시 박달재. 소나무 오종종히 서 있는 그 고갯길을 따라 백운면 애련리로 들어가다 보면 폐교된 백운초등학교 애련분교를 고쳐 지은 원서문학관이 나온다. 배우 설경구가 달려오는 열차를 향해 "나 돌아갈래"하고 절규하던 영화 <박하사탕>의 그 기찻길 장면을 찍은 진소마을 앞이다.

'폭설', '해피 버스데이'의 시인 오탁번(72)은 기자가 찾아간 지난해 10월 20일 원서문학관 마당에서 맨손으로 마늘밭 거름을 섞고 있었다. 시어를 엮어 문장을 만드는 글짓기처럼, 농사도 시작할 땐 제대로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지난 2003년 이곳으로 귀향한 오 시인은 이웃 농부들로부터 흙을 일구고 비료 쓰는 법 등을 귀동냥해 가며 텃밭을 가꾸었다. 농사가 주는 기쁨은 수확이 다가 아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는 말처럼 자연과 어울리며 깨닫는 신비로움이 크고, 그것은 곧 시가 되었다.

마늘밭 씨마늘처럼 왕겨 덮고
춥고 혹독한 겨울을 지나온 나는
소쩍새 울음처럼 마늘쫑도 싱그러운
잘 생긴 육쪽 마늘이 된 줄 알았다
참숯마냥 빛나던 머리칼
어느새 다 없어진 오늘,
아뿔싸!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수퍼마켓에서 파는
표백제 바른 깐 마늘이 되었음을
나는 이제 알겠다
('마늘' 중에서)

천등산 아래서 지독한 가난 겪었던 수재



▲  원서문학관 안에 있는 오 시인의 서재에서 소주를 나눠 마시며 인터뷰를 진행했다.
오 시인의 서재에서 소주병을 앞에 놓고 시작한 인터뷰는 사연 하나에 시 한 편으로 이어졌다. 상처 같은 시를 읊다 슬픔에 젖을 때면 시인은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두어 시간 동안 둘이서 소주 두 병을 비웠다.

오 시인은 1943년 제천시 백운면에서 마을 이장의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자부심 강한 양반의 후손으로 일제강점기 때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버텼던 아버지는 오 시인에 세 살 되던 해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홀로 삯바느질을 해서 가족을 먹여 살렸다. 가난에 전쟁까지 겹쳤던 어린 시절, 오 시인은 '먹을수록 배고픈' 천등산 진달래꽃을 따먹으며 굶주림을 견뎌야 했다. 피난갔다 왔더니 잿더미가 돼 버린 마을에서 움막을 짓고 산나물 죽을 끓여 먹기도 했다. 영양실조에 기생충, 야뇨증에도 시달렸다.

국민(초등)학교 6년 내내 1등을 차지해 도지사상을 받을 정도로 명석했지만 중학교 진학은 포기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오 시인이 다니던 백운초등학교에 권영희 선생이 부임하면서 희망이 생겼다. 권 선생은 가난하지만 영특했던 오탁번을 끔찍이 아껴주고 중학교 입학금까지 대주었다. 또 강원도 원주에 살던 오빠에게 부탁해 숙식 일체를 책임져 주었다. 소년의 운명이 바뀌었다.

누나다 누나다 선생님이 이젠 누나다
영희 누나다 영희 누나다
개울물 반짝이는 평장골 뒷개울에서도
고드름 떨어지는 겨울 한나절에도
누나와 동생으로 꾸는 꿈은
솔개그늘처럼 아늑했다
영희 누나가 있으면 배고프지 않았다
울지도 않고 숙제도 잘했다
영희 누나한테 착한 어린이가 되지 못한 날은
꿈속에서 벌서며 오줌을 쌌다
('영희 누나' 중에서)
    


▲  1954년 오탁번 시인이 12살 때의 흑백사진을 바탕으로 스케치했다. 왼쪽 위부터 둘째형 탁승, 셋째형 탁운, 오른쪽이 권영희 선생. 아래가 누나 탁분이다.

하지만 권 선생의 도움은 한 해를 넘기지 못했다. 중고생 오탁번은 입주 가정교사 등을 하며 숙식을 해결했다. 가난은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기름진 밥 먹고 용돈 든든히 받아가며 공부하는 친구들이 부럽고 자신의 처지가 원망스러웠다.

"친구 집에서 입주 가정교사를 하며 숙식을 하고 있었는데 밥숟가락에 물이 떨어져. 눈물이야. 넉넉한 집에 사는 친구에게 계속 열등감을 느꼈던 거지. 숟가락 놓고 학교 가서 선생님에게 못 다니겠다고 말했지. 그날로 학교를 그만뒀어."

더 이상 학교는 안 나갔지만 원주고등학교는 어찌어찌해서 오 시인에게 졸업장을 주었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22살에 고려대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고대신문 편집장, 고대 '응원의 노래' 작사가가 됐고 30년 동안 모교의 국어교육학과 교수생활을 했다. 오탁번은 잠시 말을 멈췄다. 눈시울이 붉어져있다. "돌아보니 우습다"고 한숨 쉬듯 내뱉는다.

그의 글 실력은 원주고등학교 시절부터 빛을 발했다. 청소년문예지 <학원>에 시와 산문이 여러 차례 실렸고 고3때 시 <걸어가는 사람>으로 학원문학상을 받았다. 고대신문사 기자를 하던 24살 때는 동화 <철이와 아버지>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고 이듬해 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는 시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으로 입상했다.



▲  고려대학교 영문과 3학년 때 오탁번. 겨울 새하얀 캠퍼스에서 눈 뭉치를 던지고 있다.

군 입대를 앞두고는 소설 <처형의 땅>으로 등단했다. 동화, 시, 소설 세 장르에 모두 '싹수'를 보였던 셈이다. 이후 <손님>, <우리 동네> 등 시집 8권, <현대시의 이해>, <헛똑똑이의 시 읽기> 등 평론집과 산문집을 다수 발표했다. 1997년에 시 '백두산천지'로 제9회 정지용 문학상을 받았고 2008년에는 38대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여러 시 작품 중에서도 '백두산천지'에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이 시는 인큐베이터에 들어갔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고 나온 신생아와도 같아요. 건강이 시원찮은 나를 모태로 한 죄로 마음속에서 다시 잉태되고 발육되는 일이 반복되다가 이제 비로소 가장 단순한 모음으로 이 세상을 향하여 첫 울음을 울고 있는 거죠."

하늘과 땅 사이는 애초부터 없었다는 듯 천지가 그대로 하늘이 되고 구름결이 되어 백두산 산허리마다 까마득하게 푸른하늘 구름바다 거느린다. 화산암 돌가루가 하늘 아래로 자꾸만 부스러져 내리는 백두산 천지의 낭떠리지 위에서 나도 자잘한 꽃잎이 되어 아스라한 하늘 속으로 흩어져 날아간다. 아기집에서 갓 태어난 아기처럼 혼자 울지도 젖을 빨지도 못한다. 온가람 즈믄 뫼 비롯하는 백두산 그 하늘에 올라 마침내 바로 서지도 못하고 젖배 곯아 젖니도 제때 나지 못할 내 운명이 새삼 두려워 백두산 흰 멧부리 우러르며 얼음빛 푸른 천지 앞에 숨결도 잊은 채 무릎 꿇는다('백두산천지' 중에서).

익살과 유머로 버무리는 즐거운 시 작업

인터뷰 도중에 전화가 걸려왔다. 충북 청주의 한 신문사에서 문화행사의 시 낭송을 부탁하는 전화다. 사양할 듯하다가 결국 약속을 잡는다. 오탁번의 시에는 특유의 천진함과 자유, 유머가 넘쳐난다. 그래서 전국의 시낭송회에 자주 초대된다.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폭설)' 등 눈치 보지 않는 표현들이 독자를 사로잡는다. 박현수 경북대 국문과 교수는 "오탁번의 익살은 삶의 틈새를 진솔하고 자유롭게 오가는 시원시원한 행보에서 시작한다"고 평했다.

"내가 원래 장난기가 많은 사람이지. 어렵게 자랐지만 유년시절부터 장난기가 많았어. 시란 것이 이념이나 사상을 담기엔 한계가 있지. 서동요나 헌화가를 봐. 다 '놀이'면서 시잖아.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주 슬프게 탄식하는 소리는 웃음소리와 닮아 있어. '허허!'를 생각해봐."



시골 버스 정류장에서
할머니와 서양 아저씨가
읍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시간이 제멋대로인 버스가
한참 후에 왔다

-왔데이!

할머니가 말했다
할머니 말을 영어인 줄 알고
눈이 파란 아저씨가
오늘은 월요일이라고 대꾸했다

-먼데이!

버스를 보고 뭐냐고 묻는 줄 알고
할머니가 친절하게 말했다

-버스데이!
('해피 버스데이')

오 시인은 젊은이들이 문자메시지 등을 쓸 때 애용하는 이모티콘(그림문자)이나 특수문자도 자유롭게 활용한다. 체면과 규범에 갇히지 않는다. 무엇보다 우리말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다. 국어사전을 베개처럼 안고 산다고 한다.

'홰친홰친(낚싯대에 물고기가 걸린 것처럼 탄력 있는 물체가 흔들거리는 모양새)' '다람다람(물방울 따위의 자그마한 물건들이 잇따라 매달려 있는 모양)' '눈흘레(눈요기로써 상대를 보며 성교하는 일을 상상하는 것) 등 잘 모르던 우리말을 찾은 날엔 위스키 한 잔 '원샷'하고 산삼 찾은 심마니 마냥 동네를 쏘다닌다고 말했다.

깃발 같은 시는 안 돼

오 시인은 '향수'의 시인 정지용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80년대 민중시가 유행할 때도 대학에서 서정주 시론을 강의했다. 제자에게는 '통영' '고향'의 시인 백석을 연구 시키기도 했다. 서정시를 가르치면 비겁자로 몰리기도 했던 시대였다. 학생들로부터 비난을 받은 일도 있다. 하지만 그는 일부 진보성향 시인들이 대자보처럼 시를 쓰는 게 못마땅하다고 말했다.

"민중시의 치열성은 의의가 있다손 치더라도 대자보의 격문과 다를 게 없어. 나는 언제나 문학 작품으로 현실을 다룰 때는 그 현실조차도 문학의 일부가 되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이미 문학의 위쪽이거나 혹은 아래쪽이라는 신념을 지니고 있거든."

걸레처럼 살면서 / 깃발 같은 시를 쓰는 척하면 된다 / 걸레도 양잿물에 된통 빨아서 / 풀 먹여 다림질하면 깃발이 된다 ('우리 시대의 시창작론' 중에서)

오 시인은 수도여자사범대학을 거쳐 36살부터 고려대학교 국어교육학과 교수로 일했다. 2008년 8월에 같은 대학 최장집 교수(정치학)와 함께 정년퇴임했다. 교수라는 안정된 자리에서 작품 활동으로 상도 타고 하니 문단의 시기와 질투가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밤새 고민하며 써낸 시를 '가벼운 재주 자랑'으로 폄하하는 시선에 가슴앓이도 많이 했다. 하지만 세월은 그 모든 것을 지나가게 만들었다.

"1970년대 고대 교수하니까 내가 술값을 내는데, 전업 작가들이 부러워 죽으려 그래. 그런데 10년 전인가 청계산 밑에서 최인호씨를 만났어. 일주일에 두세 번 산을 타더라고. 짜식이 차를 마시면서 하는 말이 '오형도 소설 쓸 걸 했어'라는 거야. 히트작가가 돼서 나보다 돈벌이가 더 좋다는 거지. 역전이 된 거야(웃음)."

교육 못 받았지만 큰 어른이었던 어머니



▲  오탁번 시인은 원서문학관 앞에 어머니 조각상을 세워놓고 늘 아침저녁으로 문안한다.
오탁번에게 '유일한 종교'는 어머니다. 나이 서른에 오탁번을 낳고 서른셋에 과부가 된 어머니는 초등학교도 안 나왔지만 한문을 스스로 깨우쳤고 인정이 많아 마을에서 큰 어른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늘 오 시인을 전폭적으로 믿었다. 고등학교를 그만뒀을 때도 "탁번이 냅둬라, 내가 안다"고 한마디 한 것이 다였다.

"어머니는 나에게 큰 바위 얼굴, 북한식으로는 최고 존엄이었지."

오 시인은 원서문학관 앞에 어머니의 조각상을 세워놓고 노란 국화꽃을 올려놓았다. 힘들 때면 초롱불을 들고 마당에 나와 돌아가신 어머니와 '교신'한다. '안심하여라. 너는 험한 꼴은 보지 않는다.' 비행기를 탈 때도 고속도로를 운전할 때도 늘 어머니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어머니 어머니
하관의 밧줄이 흙에 닿는 순간에도
어머니의 모음을 부르는 나는
놋요강이다 밤중에 어머니가 대어주던
지린내나는 요강이다 툇마루 끝에 묻힌
오줌통이다 오줌통에 비치던
잿빛 처마 끝이다
이엉에서 떨어지던 눈도 못 뜬
벌레다
밭두럭에서 물똥을 누던
어머니가 뒤 닦아주던 콩잎이다 눈물이다
저승은 한줌 재로 변하여
이름모를 뿌리들의 풀꽃으로 돌아오고
('하관' 중에서)

60년 만에 돌아온 고향, 배고팠던 시인을 키운 곳



▲  충북 제천시 백운면의 원서문학관 전경

오 시인은 지난 2003년 백운국민학교 애련분교의 부지와 건물을 샀다. 자신이 다니던 국민학교의 분교다. 교실 세 칸과 숙직실, 안채를 손보아 아담한 문학관을 만들었다. 제천과 원주 일대를 둘러보다 결국 '삶의 밑변'이었던 천등산 박달재 아래로 자리 잡았다. 문학관의 이름은 원서헌(遠西軒), 제천에서도 먼 서쪽이라는 뜻의 조선시대 지명이다. 해가 지는 곳이다.

"서방정토(불교에서 말하는 서쪽 끝의 극락세계)의 심상이 떠오르게 하지. 서쪽은 해가 기우는 땅으로 몰락을 의미해. 그런데 소멸은 곧 생성의 출발이기도 하거든. 그런 의미에서 '먼 서쪽'이라는 뜻의 '원서'라는 이름이 그윽하고 좋게 다가왔어."

원서문학관은 누구의 문학세계를 기리는 곳이 아니라 누구나 와서 둘러보고 글을 쓸 수 있는 곳이다. 매년 여름방학에 지역의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무료 어린이시인학교를 열었다. 각지에서 온 시인들이 자원봉사를 했다. 또 '원서문학관 시의 축제'를 열어 야생화와 농부, 모국어 등을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다. 오 시인은 이제 학생들 보다는 시 선생들을 제대로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혼자 이 모든 일을 하려니 작은 몸뚱이가 힘겨워. 요즘 시 교육이 엉망이거든. 교육자들을 상대로 재교육을 하고 싶어. 그게 내 역할이기도 하고."

전생(前生)의 꿈을 꾸듯 찾아온 고향에 손윗사람들은 대부분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오 시인은 젊은 시절 '라라(영화 <닥터지바고>의 여주인공)'라고 불렀던 부인 김은자(한림대 국문과) 교수와 함께 이곳에서 '느린 삶'을 즐길 생각이다. 텃밭에 심은 채소와 함께 고기를 구워먹으며 정겨운 손님들과 두레반(둘러앉는 밥상) 밥 냄새를 풍기며 살고자 한다.

대문을 들어설 때부터 풍겨오는
맛있는 밥냄새를 맡고
내가 어머니의 등에서 울며 보채면
장지문을 열고 진외당숙모가 말했다

언놈이 밥 먹이고 가요
그제야 나는 울음을 뚝 그쳤다
밥소라에 퍼주는 따끈따끈한 밥을
내가 하동지동 먹는 걸 보고
진외당숙모가 나에게 말했다

밥때 되면 만날 온나

아, 나는 이날 이때까지
이렇게 고운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태어나서 젖을 못 먹고
밥조차 굶주리는 나의 유년은
진외가 집에서 풍겨오는 밥냄새를 맡으며
겨우 숨을 이어갔다
('밥냄새' 중에서)

*진외가: 아버지의 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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