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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것은 오고 갈것은 간다

뉴우맨 2022. 8. 24. 10:12

올 것은 오고 갈 것은 간다.-법상스님
                                      혜명(해인)스님

[숫타니파타]에서 말합니다.
“옛 것을 너무 좋아하지도 말고,
새것에 너무 매혹당하지도 말라.
떠나가는 자에 대해 너무 슬퍼할 필요도 없고,
새롭게 다가와 유혹하는 자에게도 사로잡혀선 안 된다.

이것이 바로 貪欲이며,
거센 물결이며, 불안, 초조, 근심, 걱정이며,
건너기 어려운 저 欲望의 늪인 것이다.”

사람이든,
소유물이든,
명예나 지위가 되었든 그 因緣이 내게 왔을 때는 온 것을 잘 쓰지만,
그 因緣이 다해서 떠나야 할 때가 되면 떠나도록 내버려 둘 수 있어야 한다.
이 世上 모든 것들은 다 내 마음대로 오고 가는 것이 아니다.
諸各各 스스로의 因緣을 따라서 왔다가 諸各各 因緣이 다 하면 스스로 갈 뿐,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다 내 마음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옛 것,
익숙한 것,
기존의 것,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고 해서 過度하게 執着하거나 사로잡힐 일도 없고,

새것,
새로운 것,
낯선 것이라고 해서 너무 過度하게 매혹당할 일도 없다.

익숙한 것이 떠나갈 때도,
새로운 것이 다가올 때도,
이 세상 모든 것들은 因緣을 따라서 그저 왔다가 떠나가는 諸行無常의 屬性을 지니고 있다는 事實을 깨닫게 되면 이 세상 어느 것도 붙잡거나 버릴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사람도,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붙잡지 말아야 한다.
印度에서 夫婦와 아들이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 세 사람이 길을 걷다가 잠시 그늘 아래서 쉬고 있었는데, 그때 마침 젊은 한 男子 여행자가 함께 쉬게 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뒤 젊은 男子 여행자가 길을 떠나는데, 함께 쉬고 있을 동안 어머니가 그 젊은 남자 여행자와 눈이 맞아서 젊은 남자 여행자를 뒤따라 가게 된 것이다.

아들은 당황하여 아버지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태연하게 자신의 길을 다시 걸을 뿐이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쩔 거냐고 따져 물었더니 아버지가 對答했다.

“네 어머니가 내게 처음 올 때도 自身의 意思에 따라 었고, 지금 떠나갈 때도 自身의 意思決定에 따라 다만 自身의 길을 가는 것일 뿐이다.

自身의 意思決定을 따라서 길을 왔다가 自身의 意思決定에 따라서 길을 가는 것을 내가 어쩌겠느냐?”라고. 아무리 夫婦 지간 이라고 할지라도 子息이라고 할지라도 그들 또한 事實은 내 所有物이 아니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누구나 내게 왔을 때는 이름다운 生의 旅行을 함께 해 나갈 수 있지만, 떠나갈 때가 되었을 때엔 떠나갈 수 있도록 마음에 過度한 사로잡힘이 있어서는 안 된다.

因緣이라는 것은 어차피 한 번 맺어지면 어떻게든지 한 번은 꼭 반드시 헤어질 수밖에 없는 必緣으로 맺어졌기 때문이다.
會者定離 生者必滅처럼 죽음 앞에서는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物質도 마찬가지다.
그 어떤 所有物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오는 것을 애써 막을 일도 없고, 내게서 멀어지는 것을 애써 잡을 일도 없다.
境界 또한 그렇다.
오는 逆境界라도 막을 일 없고,
가는 順境界라도 붙잡아 두려고 애쓸 일 없다.
내게 왔던 因緣이 다 하면 갈 뿐, 가고 나면 또 다른 因緣이 다가올 것이다.
因緣이 아니라면 오지 않을 뿐, 그 因緣 오지 않더라도 또 다른 因緣이 올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을 내 마음대로 뭘 어떻게 하려고 하는 그 마음만 텅~비워서 놓아버리고 살면, 물 흐르듯 그냥 그냥 살면, 오고 가는 것도 없고, 좋아하고 싫어할 것도 없고, 맞는 것도 틀리는 것도 없고, 성공도 실패도 없고, 바램도 성취도 없고,

그냥 다 좋을 뿐.
그냥 좋고 싫은 것도 없이 이 세상 모든 것들이 그냥 그냥 그러할 뿐 如如하게 그러할 뿐이다.

올 것들은 正確히 오게 되어 있고, 갈 것들은 正確히 가게 되어 있다.
붙잡는다고 갈 것이 오는 것도 아니고, 막는다고 올 것이 가는 것도 아니다.
이 世上 모든 것들을 다만 宇宙法界의 因緣 흐름에 맡기고 받아들이라.

自然스러운 삶의 흐름에 自身을 내맡겨라.
宇宙法界의 因緣이라는 바다의 흐름에 온 存在를 내맡기고 다만 그 흐름을 타고 그 흐름을 따라 함께 흘러가라.

어떤 길로 가려고 애쓸 것도 없고, 이미 지나온 길을 거슬러 되돌아가려고 後悔하지도 말고, 아직 오지 않은 길을 찾으려 애쓸 일도 없이 다만 因緣 따라 흘러가면 된다.
ㅡ옮겨 옴-

슬플 때는 슬픈 음악을!

인생이란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다. 지혜는 이성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 속에 있는 것이다. 아! 나는 오늘날까지 너무 조심스럽게 살았다. 새로운 법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법 없이 살아야 한다.

오 해방이여! 오, 자유여! 나의 욕망이 다다를 수 있는 곳까지 나는 가리라. 오, 내가 사랑하는 그대, 함께 가자꾸나, 그곳까지 그대를 데리고 가리라, 그대가 더욱 멀리 갈 수 있도록.

행복해질 필요가 없다고 굳게 믿을 수 있게 된 그날부터 내 마음속에 행복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렇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내게 필요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굳게 믿게 된 그날부터.

이기주의를 곡괭이로 내리찍고 나자 곧 내 심장에서 기쁨이 어찌나 넘치도록 뿜어 나오는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그 기쁨의 물을 마시게 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장 훌륭한 가르침은 모범을 보이는 것임을 나는 깨달았다. 나는 나의 행복을 천직으로 받아들였다.

변덕스러운 영혼이여, 서둘러라! 가장 아름다운 꽃은 또한 가장 빨리 시든다는 사실을 알라. 그 꽃의 향기를 어서 빨리 허리 굽혀 맡아보라. 영원불멸인 것에는 향기가 없는 법.

즐겁게 타고난 영혼이여, 그대의 노래의 투명함을 흐리게 하는 것은 무엇이건 두려워하지 말라. 그러나 지나가 버리는 모든 것 속에서 불변하는 신은 물체가 아니라 사랑 속에 깃들어 있음을 나는 깨달았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순간 속에서 고요한 영원을 맛볼 줄 알게 되었다.

<‘지상의 양식’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앙드레 지드 지음, 김화영님 옮김, 민음사 출판>

* 앙드레 지드 : 1869년 파리 법과 대학 교수인 아버지와 루앙의 유복한 사업가 집안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격정적인 성격에 몸이 허약했던 지드는 열한 살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어머니와 외사촌 누이 등 여자들에 에워싸인 채 엄격한 청교도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는 동안 신경 쇠약에 시달렸다.

1893년 북아프리카 여행 중 결핵으로 신음하다가 회복되면서 처음으로 삶의 희열과 동성애에 눈을 뜨고, 마침내 모든 도덕적∙종교적 구속에서 해방되어 돌아온다. <지상의 양식>은 시, 일기, 여행기록, 허구적인 대화 등 다양한 장르가 통합된 형식으로, 이때의 해방감과 생명의 전율을 노래한 작품이다.

<좁은 문>.<교황청의 지하도>,<전원 교향곡>.<위폐 제조자들>,<소련 기행>등 작품 20세기 프랑스 문단에 막강한 영양력을 행사했다. 1938년 아내가 사망한 후 일생동안 꾸준히 써온 여러 권의 <일기>를 발표하기 시작했고, 1947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1951년 파리의 자택에서 폐 충혈로 사망했다.

감포항

척사길 해변에서~!
송대말 등대
울진 후포항

고독이 모자라고, 외로움이 모자란다.
꽤 멀리까지 걸었습니다.
다섯 시간 정도 혼자서
그래도 고독이 모자라네요.
아무도 지나가는 사람이 없는 골짜기이지만
그래도 외로움이 모자랍니다.
- 카프카의 <펠리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나의 인생은
자살 충동을 떨쳐버리는 일만으로
다 소진되고 말았다. - 카프카의 <단편>에서

인생의 곁길로 새다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곁길로 새는 일이다.
원래는 어디로 향하고 있었던가.
뒤돌아보는 일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 <단편에서>

산책 한번하고 지쳐서 사흘 동안 아무것도 못하다
가벼운 산책 한번 했다고
거의 사흘이라는 시간을
꼼짝 못하고 지냈습니다.
- 카프카의 <밀레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용기만 있다면, 모든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월트 디즈니 같은 유명한 사람이 남긴 명언이다. 실제로 이런 명언을 듣고 위로 받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려운 난관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이런 말로 위로한다면 어쩌면 자신과는 맞지 않는 배부른 소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심각한 병에 걸린 사람한테 “괜찮아, 낫는다고 생각하면 나을 수 있어”라고 격려하는 것이 실제로는 별 도움이 안 되는 것처럼, ‘죽을 각오로 덤비면 못 할 일이 없다’는 격려의 말도 마찬가지다.

슬플 때는 슬픈 음악을

그리스의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마음이 괴로울 때는 ‘오히려 슬픔을 잊게 만드는 밝은 음악을 듣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이를 ‘피타고라스의 반대효과’라고 한다. 현대 음악요법에서 ‘이질(異質)의 원리’라고 부르는, 아주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이다.

이와 반대로 ‘그때의 기분과 같은 분위기의 곡을 듣는 편이 마음을 치유시켜준다’고 주장했다. 즉 슬플 때는 슬픈 음악을 듣는 것이 좋다는 말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질효과’라고 부른다. 현대 음악요법에서 ‘동질의 원리’로 불리며 중요한 개념으로 여겨지고 있다.

양자의 의견은 완전히 정면대립하고 있는 셈이다. 먼저 슬픈 음악을 듣고, 그 후에 즐거운 음악을 듣는 것이 아마도 최선일 것이다. 이래야 무리 없는 회복이 가능하다. 실연당했을 때, 슬픈 가요나 슬픈 멜로디의 음악이 귀에 쏙쏙 들어오고 마음에 와 닿는 것처럼 말이다. 처음부터 명랑한 음악을 들어봤자, 마음에 와 닿을 리 없다.

명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괴로움에 빠진 사람에게 아무리 긍정적이고 좋은 말을 들려준다 해도 마음에 와 닿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역시 우선 슬픔에 푹 잠겨보는 것도 필요할 거라고 생각한다.

너무 지나치게 절망적이라 오히려 웃음이 난다.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일은 내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미래를 생각하고 걸려 넘어지는 일이라면 가능합니다.
제일 잘할 수 있는 것은 넘어진 채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너무나 부정적이라 오히려 웃음이 날 지경이다. 깊은 슬픔에 빠진 사람도 극단적으로 절망하는 카프카의 모습을 보고나면 ‘난. 이 정도까지는 아닌데’하는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카프카만큼 절망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생각한다.

카프카는 절망의 명인이다. 그 누구보다 엄살을 떨었으며, 절대로 앞으로 나아가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우리는 긴장하지 않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것이다. 성공한 사람이 높은 곳에 서서 잘난 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카프카의 진정한 언어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일 때도,
또다시 새로운 힘이 솟아오른다.
그것이 바로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만일 그런 힘이 솟아나지 않는다면
그때는 모든 것이 끝난 것이다.
다 끝난 것이다.

뒷부분이 카프카적인 정수가 담긴 지점이다. 카프카는 자기 자신을 하잘것없는 벌레처럼 여겼지만, 소설가로서 그는 분명 20세기 최고의 작가라고 불릴 정도의 거인이다.

<‘절망은 나의 힘, 카프카의 위험한 고백 86’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프란츠 카프카지음, 가시라기 히로키엮음, 박승애님 옮김, 한스미디어 출판>

* 카프카 : 1883.7 체코 프라하에서 부유한 유대인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으며, 노동자상해보험협회에서 근무하면서 소설을 썼다. 1924년에 41세의 나이로 결핵으로 사망했다. <실종자>, <소송>, <성>외에 많은 단편과 에세이, 일기, 편지 등을 남겼다. 현재 “20세기 최고의 소설가‘라는 평가를 받는 위대한 작가 중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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