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 관한 시
비가 아침부터 내려서 외출도 하지 못하고 집에서만 있게 되었군요.
아름다운 비에 관한 시 몇편 올려 드려요.
빗방울은 둥글다
만약에
빗방울이
세모나 네모여 봐
새싹이랑
풀잎이
얼마나 아프겠니?
비 오는 날
낡은 구두는
젖은 발이 안쓰럽습니다
젖은 발은
새는 구두가 안쓰럽습니다.
봄비 그친 뒤
비 갠 날 아침에
가장 빨리 달리는 건 산안개다.
산안개가 하얗게 달려가서
산을 씻어내면
비 갠 날 아침에
가장 잘 생긴 건
저 푸른 봄 산이다.
우현(雨絃)환상곡
빗줄기는 하늘에서 땅으로 이어진 현(絃)이어서
나뭇잎은 수만 개 건반이어서
바람은 손이 안 보이는 연주가여서
간판을 단 건물도 고양이도 웅크려 귀를 세웠는데
가끔 천공을 헤매며 흙 입술로 부는 휘파람 소리
화초들은 몸이 젖어서 아무데나 쓰러지고
수목들은 물웅덩이에 발을 담그고
비바람을 종교처럼 모시며 휘어지는데
오늘은 나도 종교 같은 분에게 젖어 있는데
이 몸에 우주가 헌정하는 우현환상곡.
나뭇잎을 닦다
저 소나기가 나뭇잎을 닦아주고 가는 것을 보라
저 가랑비가 나뭇잎을 닦아주고 가는 것을 보라
저 봄비가 나뭇잎을 닦아주고 기뻐하는 것을 보라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 고이고이 잠드는 것을 보라
우리가 나뭇잎에 얹은 먼지를 닦는 일은
우리 스스로 나뭇잎이 되는 일이다
우리 스스로 푸른 하늘이 되는 일이다
나뭇잎에 앉은
먼지 한번 닦아주지 못하고 사람이 죽는다면
사람은 그 얼마나 쓸쓸한 것이냐
소나기
저물 무렵
소나기를 만난 사람들은
알지
누군가가 고즈넉이 그리워하며
미루나무 아래 앉아 다리쉼을 하다가
그때 쏟아지는 소나기를 바라본
사람들은 알지
자신을 속인다는 것이
얼마나 참기 힘든 걱정이라는 것을
사랑하는 이를 속인다는 것이
얼마나 참기 힘든 분노라는 것을
그 소나기에
가슴을 적신 사람이라면 알지
자신을 속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속이는 것이
또한 얼마나 쓸쓸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비 오는 날
아침 깨니
부실부실 가랑비 내린다.
자는 마누라 지갑을 뒤져
백오십 원을 훔쳐
아침 해장으로 나간다.
막걸리 한 잔 내 속을 지지면
어찌 이리도 기분이 좋으냐?
가방 들고 지나는 학생들이
그렇게도 싱싱하게 보이고
나의 늙음은 그저 노인 같다
비오는 아침의 이 신선감을
나는 어이 표현하리오?
그저 사는 대로 살다가
깨끗이 눈감으리오.
비 오는 날에
내 우산살이 너를 찌른다면, 미안하다
비닐 우산이여
나의 우산은 팽팽하고
단단한 강철의 부리를 지니고 있어
비 오는 날에도 걱정이 없었거니
이제는 걱정이 된다
빗속을 함께 걸어가면서 행여
댓살 몇 개가 엉성하게 받치고 선
네 약한 푸른 살을 찢게 될까 두렵구나
나의 단단함이 가시가 되고
나의 팽팽함이 너를 주눅들게 한다면
차라리 이 우산을 접어 두겠다
몸이 젖으면 어떠랴
만물이 눅눅한 슬픔에 녹고 있는데
빗발이 드세기로
우리의 살끼리 부대낌만 하랴
비를 나누어 맞는 기쁨,
젖은 어깨에 손을 얹어
따뜻한 체온이 되어줄 수도 있는
이 비 오는 날에
내 손에 들린 우산이 무겁기만 하다
우산 속으로도 비 소리는 내린다
우산은 말라가는 가슴 접고
얼마나 비를 기다렸을까
비는 또 오는 게 아니라
비를 기다리는 누군가를 위해
내린다는 생각을 위하여
혼자 마신 술에 넘쳐 거리로 토해지면
우산 속으로도 빗소리는 내린다
정작 술 취하고 싶은 건
내가 아닌 나의 나날인데
비가와 선명해진 원고지칸 같은
보도블록을 위를
타인에 떠밀린 탓보단
스스로의 잘못된 보행으로
비틀비틀 내 잘못 써온 날들이
우산처럼 비가 오면
가슴 확 펼쳐 사랑한번 못해본
쓴 기억을 끌며
나는 얼마나 더 가슴을 말려야
우산이 될 수 있나
어쩌면 틀렸을지도 모르는 질문에
소낙비에 가슴을 적신다
우산처럼 가슴한번
확 펼쳐보지 못한 날들이
우산처럼 가슴을 확 펼쳐보는
사랑을 꿈꾸며
비 내리는 날 낮술에 취해
젖어오는 생각의 발목으로
비가 싫어 우산을 쓴 것이 아닌
사람들의 사이를 걷고 또 걸으면
우산 속으로도 빗소리는 내린다
가랑비 오는 날
가랑비가 촉촉이 내렸어요.
꽃들 머리를 어루만지며
우리 머리를 어루만지며
하느님이 오늘만큼은 우리를
꽃으로 여기셨나 봐요.
꽃같이 여기셨나 봐요.
모처럼 오늘은
나도 한 송이 꽃이 아니었을까?
풀밭에서
여우비
그친 뒤
풀밭에 갔더니
빛들은
풀잎으로
알몸을 가리고
젖은 몸을 말리고 있었다.
부끄러운 아기 얼굴로
배시시 웃고 있었다.
빗방울의 더하기
톡톡톡
잎새에 더해
초록빛 키우고
톡톡톡
꽃잎에 더해
꽃잎 웃음 키우고
톡톡톡
냇물에 더해
물소리 키운다
톡톡톡
더하면서
남은 키우고
톡톡톡
더하면서
제 모습은 뺀다.
세우
가는 비 꽃잎에 삽삽이 내리고
강건너 마을은 비안개로 흐리다
찔레꽃 찬 잎은 발등에 지는데
그리운 얼굴은 어느 마을에 들었는가
젖은 몸 그리움에 다시 젖는 강기슭
오늘 밤 비 내리고
오늘 밤 비 내리고
몸 어디인가 소리없이 아프다
빗물은 꽃잎을 싣고 여울로 가고
세월은 육신을 싣고 서천으로 기운다
꽃 지고 세월 지면 또 무엇이 남으리
비 내리는 밤에는 마음 기댈 곳 없어라
비 내리는 밤
빗방울은 창에 와서 흐득이고
마음은 찬 허공에 흐득인다
바위 벼랑에 숨어서
젖은 몸으로 홀로 앓는 물새마냥
이래가 멀다하고
잔병으로 눕는 날이 잦아진다
별마저 모조리 씻겨 내려가고 없는 밤
천 리 만 길 먼 길에 있다가
한 뼘 가까이 내려오기도 하는 저승을
빗발이 가득 메운다
저녁비
왕거미 솔잎 사이 제 집에 급히 오르고
저녁 구름 너머로 초승달은 날락들락
길이 멀은 저녁새 날개짓 바쁜데
머리꼭지 적시는 빗 방울은 오락가락
비를 그을 마을은 얼마나 남았는가
천리를 걸어도 앞길은 캄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