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하나 💕
뉴맨 / 정경삼
너라는 사람과
나라는 사람이
함께는 만남이고
떨어지면 이별이다
우리는 둘
보태고 뭉치면 하나
마음도 하나
돌아서면 둘
함께하는 기쁨
돌아서는 아픔
모두가 하나의
마음
우리는 아프게 하지도 말고
그냥 좋아만 하고
사랑만 하자
🍒늙음의 미학(美學)🥀
😀 점잖음,
그것은 중후(重厚)한 인생(人生)의
완결(完決)이자
노인(老人)이 보여줄 수 있는
장엄(莊嚴)한 아름다움이다.
늙음의 미학(美學)을 가르쳐 준
박경리 박완서~~~
소설가 박경리씨는 이렇게 말다.
『옛날 그집』 시(詩)한 귀절(句節)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아~편안(便安)하다
버릴것만 남아있으니
늙으니 이리도 편안(便安)한것을~
-소설가 박경리 선생이
부음을 몇일 앞두고-』
다음은 박완서씨가 썼던 글이다.
나이가 드니 마음 놓고
고무줄 바지를 입을 수 있는 것처럼
나 편(便)한 대로 헐렁하게
살 수 있어서 좋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안할 수 있어 좋다.
다시 젊어 지고 싶지 않다.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안 할 수 있는
자유(自由)가 얼마나 좋은데
젊음과 바꾸겠는가.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
살아 오면서
볼꼴, 못 볼꼴 충분(充分)히 봤다.
한번 본거 두번 보고 싶지 않다.
한겹 두겹 책임(責任)을 벗고
가벼워 지는 느낌을
음미(吟味) 하면서 살아 가고 싶다.
소설(小說)도 써지면 쓰겠지만
안 써져도 그만이다.
두 분은 한국 문단(韓國 文壇)을
대표(代表) 하는
여류 소설가(女流 小說家)였다.
그러면서도 조용한
시골집에서 삶을 마감 했다.
박경리(1926년 출생 2008년 사망)
박완서(1931년 출생 2011년 사망)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다.
가장 아름다운 인생(人生)은
물처럼 사는 것(若水) 이라는 뜻이다.
위의 두 분은
물처럼 살다 간 분이다.
흐르는 물처럼 남과 다투거나
경쟁(競爭)하지 않는 부쟁(不爭)의
삶을 살았고,
만물(萬物)을 길러 주지만
공(功)을 과시(誇示)하려 하지 않는
상선약수(上善若水)의 삶을 살았다.
두분의 삶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자유(自由)이다.
흘러가는 강물처럼
부딪치는 모든 것들에서 배우고
만나는 모든 것들과
소통(疏通)하면서
장강(長江)의 글을 쓰면서
그 글 속에서 인생(人生)과
사랑을 말했다.
말년의 두 분은 노년(老年)의
아름다움을 몸으로 보여 주었다.
후배(後輩)들에게 이렇게
나이 먹어야 한다고
조용한 몸 짓으로 표현(表現)했다.
박경리씨는 원주의 산골에서
박완서씨는 구리의 시골 동네에서
노년(老年)의
침묵(沈默)을가르쳐 주었다.
천천히 걸어도
빨리 달려도 주어진 시간(時間)은 오직
한 세상(世上)뿐이다.
더러는 짧게 살다가
더러는 조금 길게 살다 떠나 간다.
"두분의 삶은
이 소중(所重)한 시간(時間)을
이해(理解)하면서, 배려(配慮)하면서
살라고 말하는 것 같다."
🍂 느티나무 잎 하나 빙그르르
휘돌며 떨어진다.
내 삶의 끝자락도 저와 같다.
어느 바람에 지는 줄 모르는
낙엽(落葉)이 땅에 떨어지기 까지는
순간(瞬間)이지만,
그럼에도 자세(字細)히
관찰(觀察)해보면
그것은 분명(分明)히 절규(絶叫)가
아니라 춤추는 모습(模襲)이다.
🍂 낙엽( 落葉)지기 전의 마지막
모습(模襲)은 어떠했을까.
아름다운 단풍(丹楓)이었다.
말년(末年)의 인생( 人生)모습(模襲)도
낙엽(落葉)처럼 화사(華奢)하고
장엄(莊嚴)한
파노라마(panorama)이어라.
적어도 나의 경우(境遇)에는 봄꽃보다
가을 단풍(丹楓)을 더 아름답게 본다.
아침 이슬도 아름답지만
해 질 녘의 저녁놀은 더 아름답다.
‘삶의 유혹(誘惑)’과 ‘죽음의 공포(恐怖)’
이 두 가지에서 벗어나고자
고민(苦悶)하는 것이
인생(人生)의 참 공부다.
죽음을 향(向)해 가는 길이
늙음의 내리막길이다.
등산(登山)도, 인생(人生)도
오르는 길 힘들지만
내려가는 길은 더더욱 어렵다.
그래서 삶의 길을 멋지게 내려가기 위해
늙음의 미학(美學)을 찾아보는 것이다.
제1장은
‘비움의 미학(美學)’이다.
비움의 실천(實踐)은 ‘버림’으로써
여백(餘白)을 만드는 일이다.
버림이란 말이 맞지만
너무 냉혹(冷酷)하게 들릴 수도 있다.
점잖게 ‘나눔’이라 해도 좋다.
꽃이 비록 아름답지만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처녀가 설령 아름답지만
처녀를 버려야
‘옥동자’, ‘옥동녀’를 낳을 수 있다.
죽음이란 ‘버림’의 끝이다.
성취(成就)의 청춘(靑春)도 아름답지만
버림의 노년(老年)은 더욱 아름답다.
이것이 늙음의 미학(美學)이다.
주먹을 쥐고 태어나는 것은
세상(世上)에 대한 욕심(欲心)이요,
손바닥을 펴고 죽는 것은
모든 소유(所有)로부터의 비움 이다.
생(生)의 가장 큰 가르침은 죽음이다.
선현(先賢)은 죽음으로써
인생(人生)의 진리(真理)를
깨우쳐준다.
채운다는 관점(觀點)에서 보더라도
비운 만큼만 채울 수 있다.
🍀집지양개 (執之兩個)요,
방즉우주 (放則宇宙)다.
두 손으로 잡아보았자 두 개뿐이요,
놓으면 우주(宇宙)가 내 것인 것을.
제2장은
‘노련(老鍊)의 미학(美學)’이다.
노련(老鍊)이란 단어(單語)에는
늙을 로(老)자를 쓴다.
‘노(老)’자에는 ‘노련(老鍊)하다’는
의미(意味)가 있다.
오랜 세월(歲月)의 경륜(經綸)에서
오는 노하우(know-how)가 있어
노인(老人)은 노련(老鍊)한
경험(經驗)의 결정체(結晶體)다.
노인(老人)은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는
신중(愼重)함이 있다.
술을 마셔도 젊은이처럼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쓰러지지 않는다.
그리하여
🌵부도옹 (不倒翁)이란
별명(別名)이 붙은 것이다.
제3장은
‘점잖음의 미학(美學)’이다.
노인(老人)이 되면
언행(言行)이 무겁되 어둡지 않다.
품격(品格)이 고상(高尙)하되
야 하지 않다.
그래서 ‘점잖다’라는 말이
성립(成立)된다.
곧 ‘젊지 않다’는 말이다.
젊은이 처럼
감성(感性)에 쉬이 휘둘리거나
분위기(雰圍氣)에
가볍게 흔들리지 않는다.
지하철(地下鐵)을 공짜로 타고 다니는
‘지공거사’로서 젊은이의 잘못을
보고도 잘 나무라지 않음은
힘과 용기(勇氣)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도 그러한 시절(時節)을 겪어왔기 때문에 이해(理解)하고자 함이다.
🎋 점잖음,
그것은 중후(重厚)한 인생(人生)의
완결(完結)이자
노인(老人)이 보여줄 수 있는
장엄(莊嚴)한 아름다움이다.
제4장은
‘생각의 미학(美學)’이다.
노인(老人)이 되면
이런저런 생각이 많다.
그러다 보니 했던 말을 또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생각은
🪷 일념통천 (一念通天)의
지혜(智慧)의 샘물이다.
늙은이(늘그니)’는
‘늘 그 자리에 있는 이’다.
생각이 깊고 많기 때문이다.
그저 자리만 차지(次知)하고
있는 게 아니라
세상(世上)을 염려(念慮)하고
가문(家門)을 지키면서
늘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사고(思考)의 ‘고(考)’자는
‘늙을 로(老)’변에 속하며
’생각하다‘는 뜻이다.
노인회(老人會)나 기로연(耆老宴)은
생각이 많은 분들의 모임이다.
마지막 장은
’3분의 2의 미학(美學)‘이다.
흔히 몸은 늙었어도 마음은 아직
청춘(靑春)이라고 항변(抗辯)하는데,
이 말은 사실(事實)이다.
정신(精神)의 나이는
육신(肉身)의 나이에
3분의 2에 불과(不過)하다.
60세면 40세로 생각하고,
90세면 60세로 생각한다.
마음마저 육신(肉身)과
똑같이 늙었다고 생각하면
삶이 위축(萎縮)된다.
죽는 날까지 젊은이의 기상(氣像)으로
살아가야 한다.
젊은 생각으로써 씩씩한 만년(晩年)을
맞이해야 한다.
인류(人類)의 평균연령(平均年齡)이
급격(急激)히 늘어감에 따라
온 세상(世上)이
고령화 사회(高齡化 社會)로
접어들고 있다.
퇴직(退職)의 새벽을 맞이하면
인생( 人生)리모델링(remodeling)을
반드시 해야 한다.
내 남은 인생(人生)의 가장 젊은 날이
바로 오늘이다.
어제 죽은 자가 그토록 소망(所望)하던
오늘이다.
영리(怜悧)하고 재주가 있는
사람을 일러 총명(聰明)하다고 하는데,
총(聰)은 귀가 밝다는 뜻이며,
명(明)은
눈이 밝다는 뜻이다.
나이가 들면 눈과 귀가 어두워진다.
모든 기능(機能)이 저하(低下)되어
자세(字細)히 볼 수 없고,
또렷하게 들을 수 없다.
하지만 문제(問題)없다.
쑥떡 같이 얘기해도 찰떡 같이 듣는
훈련(訓鍊)을 평생(平生) 해온 그들이기 때문이다.
요즈음의 젊은이들은
찰떡 같이 얘기해도
쑥떡 같이 건성(件性)으로 들어버리니
낭패(狼狽)다.
아름다움의 끝은 죽음이다.
단풍(丹楓)잎이
어느 이름 모를 바람에 느닷없이
똑 떨어지듯이 그렇게 죽는 것이,
오복(五福)의 하나인
🍁고종명(考終命)이다.
죽고 사는 것이 달려 있는
매우 위태(危殆)한 고비 를 일러
🌿 사생관두(死生關頭)라 한다.
사관(死關)은
죽음의 관문(關門)인 것이다.
낙엽(落葉) 지듯
관문(關門)을 통과(通過)하는 것이
고종명(考終命)이다.
목숨이 끊어진다는 말은
식도(食道)인 목과,
기도(氣道)인 ’숨‘이 끊어진다는 말이다.
밥이 맛을 잃으면
30일 만에 죽게 되고,
공기(空氣)가 맛을 잃으면
3분 만에 죽게 된다.
순간(瞬間)의 유명(幽冥)이다.
나뭇잎 떨어지듯, 정전(停電)되듯,
눈 깜짝할 사이에 밝음과 어둠이
새벽별 보듯 또렷하다.
신(神)의 품에 다가가는
아름다운 구속(拘束)··
사유(思惟)의 대자유(大自由),
자유(自遊)의 대자유( 大自由)속에서
늙어가는 즐거움을
그대는 아는가?
올바른 어른으로
아름답게 늙어가야겠습니다.
우리 인생(人生)의 정답(正答)이
담겨져 있는것 같아
정중(鄭重)히 모셔 왔습니다,
((( 모셔온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