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펜을 잡았네 ^*>
---------소 머슴 / 뉴맨
꽃샘추위 속에
봄을 생각 하다가
널 생각하게 되었지
담 밑에
아지랑이 살랑살랑
피어오르고
그리움 한 자락
뭉개 구름 되어
떠 다닐 때
더 많이
생각나는 그대라는 사람이
참 많이 보고 싶어
펜을 잡았네
[감동글]
♡ 다섯 살 딸의 참사랑
아빠와 엄마
그리고 일곱 살 난 아들과
다섯 살 짜리 딸이 살았습니다.
어느날 아빠가 아들과 딸을 데리고
등산을 가다가 그만 교통사고를 당해
아들이 심하게 다쳤습니다.
응급수술을 받던 중 피가 필요했는데,
아들과 같은 혈액형 은 딸뿐이었습니다.
다급한 아빠가
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얘야,
너 오빠에게 피를 좀 줄 수 있겠니?"
딸아이는 이 질문에 잠시 동안
무얼 생각하는것 같더니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수술이 끝난 뒤 의사가
대성공 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때까지 딸 아이는
침대위에 가만히 누워있었습니다.
"네 덕분에 오빠가 살게 되었어!"
아빠의 말을 들은 딸이 낮은 목소리로
아빠에게 물었습니다.
"와! 정말 기뻐요.
그런데! 나는 언제 죽게 되나요?”
아버지가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아니 "죽다니? 네가 왜 죽는단 말이냐?"
"피를 뽑으면 곧 죽게 되는게 아닌가요?"
잠시 숙연한 침묵이 흐른뒤
아빠가 입을 열었습니다.
"그럼, 넌 죽을 줄 알면서
오빠에게 피를 주었단 말이냐?"
"예 ! ~ 전 오빠를 많이 사랑 하거든요."
아빠는 그 순간
두 눈에 감동의 눈물이 흘렀고
어린딸을 꼭 껴안아 놓을줄을 몰랐습니다.
♡ 생떽쥐베리의 ‘미소’
'어린 왕자’라는 아름다운 책을 쓴
안톤 드 생떽쥐베리
(antoine marie-roger de saint -exupery : 1900-1944)는
나치 독일에 대항해서 전투기 조종사로
전투에 참가했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는 체험을 바탕으로 한
"미소(le sourire)"라는 단편소설을 썼습니다.
그 소설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투중에 적에게 포로가 되어서 감방에 갇혔다.
간수들의 경멸적인 시선과 거친 태도로 보아
다음 날 처형될 것이 분명하였다.
나는 극도로 신경이 곤두섰으며
고통을 참기 어려웠다.
나는 담배를 찾아 주머니를 뒤졌다.
다행히 한 개피를 발견했다.
손이 떨려서
그것을 겨우 입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성냥이 없었다.
그들에게 모두 빼앗겨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창살 사이로 간수를 바라보았으나
나에게 곁눈질도 주지 않았다.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는
나와 눈을 마주치려고 할 사람이
어디 있을것인가.
나는 그를 불렀다. 그리고는
"혹시 불이 있으면 좀 빌려 주십시오."
하고 말했다.
간수는 나를 쳐다보고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가까이 다가와
담뱃불을 붙여 주려 하였다.
성냥을 켜는 사이
나와 그의 시선이 마주쳤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나는 무심코 그에게 미소를 지워보였다.
내가 미소를 짓는 그 순간,
우리 두사람의 가슴속에
불꽃이 점화된것이다!
나의 미소가 창살을 넘어가
그의 입술에도
미소를 머금게 했던 것이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여준 후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내 눈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나 또한 그에게 미소를 지으면서
그가 단지 간수가 아니라
하나의 살아있는 인간임을 깨달았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 속에도
그러한 의미가 깃들어 있다는것을
눈치 챌수있었다.
그가 나에게 물었다.
"당신에게도 자식이 있소?"
"그럼요. 있구말구요."
나는 대답하면서 얼른 지갑을 꺼내
나의 가족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 사람 역시
자기 아이들의 사진을 꺼내 보여주면서
앞으로의 계획과 자식들에 대한
희망등을 애기했다.
나는 눈물을 머금으며
다시는 가족을 만나지 못하게 될 것과
내 자식들이 성장해가는 모습을
지켜보지 못하게 될 것이 두렵다고 말했다.
그의 눈에도 눈물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갑자기 아무런 말도 없이 일어나
감옥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조용히 나를 밖으로 끌어내었다.
말없이 함께 감옥을 빠져나와 뒷길로 해서
마을 밖에까지 그는 나를 안내해 주었다.
그리고는 한 마디 말도 남기지 않은채
뒤돌아 서서 마을로 급히 가버렸다.
한번의 미소가 내 목숨을 구해준것이었다.
- '생떽쥐베리'의 ‘미소’
- 가져온 글 -
♡ 싱글러브 소장을 아십니까?
1977년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추진하던
주한미군 철수계획에 반대했다가
강제퇴역을 당했던
전 유엔사 참모장(예비역 소장)이
지난 1월 29일 10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고인은 1943년
로스안젤레스의 캘리포니아대학을
졸업한 뒤 곧바로 소위로 입대했다.
그는 전설적인 특공대원이었으며
그린베레로 불리는 육군특전사의
전신 OSS(전략사무국)와
CIA(중앙정보국)에서 근무했다.
그는 1949년 CIA서울지부에서 근무하며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6.25전쟁 당시에는
김화지구 전투 대대장으로 직접 참전했다.
그는 유엔사 참모장으로 근무하던
1977년 5월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5년 이내 주한미군을 철수시킨다는
카터 대통령의 계획은 곧 전쟁의 길로 유도하는
오판이라고 비판했다가 본국으로 소환된 후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군을 떠났다.
제39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미 카터는
실제로 안보 문제에는
별다른 경험도 지식도 없는 문외한이었다.
그는 김일성 정권을 선의로 대하면
군사적 긴장이 줄어들 것으로 생각했다.
그의 핵심 참모중에는 북한을 3년간 다녀와서
친북 성향의 책을 쓴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카터는 1979.6.29일
한국을 방문하는 동안 전방을 시찰하고
미군철수 의지를 거듭 밝혔다.
뿐만 아니라 의회 연설에서
한국의 인권 문제를 비난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을 분노케 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카터에게
한반도 정세를 설명하며
주한미군 감축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여기에 카터 대통령은 분노하여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카터는 설득되기는 커녕
더 강경한 자세로 나왔다.
이때 주한미군 참모장이었던
싱글러브 소장이 성조지(Star and Strips)에
주한미군 철수를 반대하는 인터뷰를 하였고
이게 국내외 언론에 크게 보도되어
큰 파장이 일었다.
카터 대통령은
즉시 싱글러브 소장을 해임하고 예편시켰다.
한국 정부는 미국이 핵우산을 걷어가면
핵무기를 개발할 것이라고
미리부터 으름장을 놓고 있었지만
막상 철군 계획이 발표되자
당황하지 않을수없었다.
이때 낭보가 들어왔다.
워싱턴포스트는
철군 반대 인터뷰의 주인공인
싱글러브 소장의 기사를 실었다.
"카터 대통령의 철군 정책은
수년전 낡은 정책에 입각한것으로
최근 정보를 경시한 것이다.
8군과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주한미군 철수안을 짰다."라는 기사였다.
싱글로브 소장의 견해는
주한미군 고위 장성들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대변했다.
한국 입장으로는 구원투수였지만
카터 입장에서는 훼방꾼이었다.
철군 정책이 결정적인 타격을 입은 것이다.
이런 파동을 거치는 사이 카터는
여러 참모들의 조언과
의회의 권고를 수렴하여
주한미군 철수 계획을 중단하였다.
미군철수라는 한반도의 상공을 덮고 있던
먹구름이 해소되기까지
싱그러브 소장의 군인정신과 헌신이 있었다.
그런 싱글러브 장군이 서거했다는 소식이다.
그는 정치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군인정신과 자세를 지키며
자기희생을 감수한 참다운 군인이었다.
주한미군 참모장 직책은 중요한 자리였고
싱글러브 소장은
중장,대장으로 승진할수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소신을 지키다가 군복을 벗고 말았다.
그후
인터뷰에서 더 승진하지 못한데 대한
아쉬움이 없느냐는 질문을 받고
이런말을 하였다.
"내 별 몇개와 수백만 명의
목숨을 바꾼것은 보람 있는 일이다."
싱글러브 장군은 군인의 길을 걸었고
그 덕분에 우리는
더 튼튼한 안보태세를 갖출 수 있었다.
한미동맹은 그때나 지금이나
대한민국 국방안보의 초석이며
핵심 동력이다.
한미동맹을 위해 노력한 수많은
한미 장병들의 헌신을 잊어서는 안된다.
싱글러브 장군의 명복을 기원한다.
- 가져온 글 -